Page 89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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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충신정려문(李商載忠臣旌閭門)
이상재충신정려문은 오산시 서동 산 60-1에 소재한다. 오산시향토문화유적 3호로 지정
되어 있다. 연대는 1815년(순조 15)이며, 정판과 정려기가 보관되어 있는 맞배지붕의 정
려각 1채로 되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구조이며, 우측칸 상부에 이상재충신정려문 정판이 있고 그 아래에
송면재(宋冕載 1764~?)가 지은 정려기 현판 1좌가 있다. 내부 좌, 우측면에 각각 백호, 청
룡이 그려져 있으며 정문은 홍살문으로 되어있다.
정려각 좌측에 협간을 두어 선생의 신위를 모신 감실을 마련하였으며 감실 입구는 판
장문으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한식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며, 겹처마로 백골집(단청
을 하지 않고 칠도 하지 않은 집)에 좌우에 방풍판이 있다. 건축 양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의 건축물로 판단된다. 정려가 내려진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숙종 33년(1707)에 정려(旌閭)가 내려짐
• 영조 17년(1741)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가 증직되면서 정판이 내려짐
- ‘忠臣 贈 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行通德郞金井
察訪 兼 承文院著作 李尙載之門 崇禎紀元再甲 辛酉 特命加贈(충신 증 통정대부 홍
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행통덕랑금정찰방 겸 승문원저작
이상재지문 숭정기원재갑 신유 특명가증)’이라 쓰여 있음
• 정려각은 순조 15년(1815)에 오산시 서동 산 60-1번지에 세워졌다.
이상재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
동 출생으로 자는 문거(文擧)이며, 옥(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정랑을 지낸 계록(繼祿)
이고, 아버지는 광해군과 동서지간이 되는 군수 덕일(德一)이며, 어머니는 유자신(柳自新)의 딸이
다. 사복시 첨정 이인후의 딸을 맞이하여 혼인하였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저작에 올
랐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중국의 사신 학사 강왈광(姜曰廣)이 크게 존경하여 시문을 받아
갔는데, 이 시가 『황화집(皇華集)』-조선시대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遠接使)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에 실려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1636년(인조 14)에 금
정도찰방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인조가 피란한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진군하다 용인의 험천(險川: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에서 적의 협공을 받아 분전했으나 전사하였다. 사후에 홍문관 교리 겸 경연참찬
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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