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오산시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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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서 여기를 중심으로 해 기호지방의 군사지휘를 하였다.
독산성은 수원시, 오산시, 화성시에 펼쳐진 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멀리
관망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이다. 옛 수원부 읍치에서 독산성에 이르는 삼남대로
상에 위치했던 세람교가 황구지천에 놓여 있었으나 유실되어 현재는 없다. 그간 세
람교의 위치를 모르다가 2006년 서수원-오산-평택간 고속도로 건설 송산 I.C구간
교량공사 도중 발견되어 지금은 그 위치를 알게 되었다. 결국 세람교 자리에 고속
도로 교량이 놓여지게 된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다리 위치는 누가 놓아도 그 자리
에 놓여지는 것을 보면, 땅도 타고난 제 역할(운명?)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다.
독산성은 조선시대 왕이 행차하던 곳이기도 하다. 인조, 영조, 사도세자, 정조 등
이 독산성을 친히 점검한다. 이렇듯 독산성은 국가의 큰 관심 속에 있었다.
독산성 남문. 지금은 진남루라 불리는 누각과 성문은 사라지고 없다. 독산성에서는 가장 큰 문이다.
이 성에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사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독산성에는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조선 제 22대 임금인 정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잠시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독산성의 주 통로였던 남문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누각 이름이 진남루(鎭南樓)였
다. 현재 이 누각은 훼손되어 없어졌다. 1760년(영조 36년)에 온양온천 행차 후 환
궁하던 사도세자가 독산성을 휘감고 흐르는 황구지천의 세람교가 장마로 범람하여
황구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 안 남쪽에 있는 운주당(運籌堂)에서 하루 유
숙하게 된다(경진년경숙 庚辰年經宿). 이날 사도세자는 성 안의 부로(父老)들에게
질고(병고)를 묻고 창고의 곡식을 출연하여 하사하였으며, 진남루에 올라 활 1순을
쏘아 연달아 4발을 얻었고 다음날 아침에 독산성을 떠났다한다. 그로부터 30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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