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오산시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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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느 옛날에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있었다한다. 먹을 것이
라고는 겨우 쌀 두되만이 남아 있었고 식량을 구할 방법도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였다한다. 노부부는 밥 한술 먹고 며칠을 더 사느니 차라리 이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여 좋은 일이라도 하고 죽자고 결심하였단다. 그리하여 쌀을 부처님께 바치
고 집에 돌아와 보니 비어있던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노부부는 이것
을 나한님의 신통력이라 여기고 더욱 치성을 올리게 되었고 이후로 보적사란 이름
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보적사는 남한산성의 장경사나 북한산성의 중흥사처럼 군진 속에 있는 사찰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사들에게 부처님의 가호를 빌어 주는 등 사기앙양
에 기여했을 것이다. 향토사학자 임종삼은 독성려왕릉의 주인공으로 비정한 백제
제16대 진사왕의 원찰로 보기도 한다. 독산성에는 2천명이 넘는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 가운데에는 승군(僧軍)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이 성
을 지키는데 힘이 되는 정도가 혹 산성의 병정보다도 나을 때가 있음을 익히 알았
기 때문이다.
정조 이후 순조 연간 용주사와 마찬가지로 독산성에는 승군이 편재되어 있었다.
당시 승군은 103명으로 보적사 6명, 용주사 85명, 만의사 1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보적사에는 6명 이상의 승려가 상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군의 치
영으로서 보적사의 역할이 중요하였던 셈이다. 순조 연간인 19세기 독산성 성내
126호, 성외 127호가 살고 있었다. 이들의 신앙 공간으로서도 보적사는 존재 의미
가 있었던 셈이기도 하다.
보적사 약사전은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당시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 주지였던 주대식스님이 약사전을 헐고 현재의 대웅전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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