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오산시역사문화
P. 55

1790년(정조  14년)  2월에  정조는  융릉(사도세자  릉)  원행  때에  서문을  통해  독산성

                  에  올라  운주당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경진년  사적을  살피게  된다.  이날  정조는
                  성안의  부로들을  부르고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가는지  물었으며,  또  성  안의  부로들
                  을  위로하고  명을  내려  승속(僧俗)과  나이를  불문하고  이들에게  특별히  경진년경숙
                  때보다  한  자급을  더해주고  성안의  민호마다  쌀포대를  지급하게  하였다.  장병들에
                  겐  승진과  시상을  하였다.  그리고  이  남문의  진남루에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

                  억하고  아버지의  위민정신을  기리고,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를  실천하고자  다짐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조선의  영명한  군주가  되어  자신을  찾아  온  아
                  들  정조를  이곳  독산성에서  영혼으로나마  부자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이
                  곳에서  가슴에  맺힌  아버지에  대한  아린  한을  풀어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추념
                  했다  한다.




























                                                   독산성  남문  진남루  터



                    독산성은  정조  때  수축을  다시  하고  공역을  시작할  때  토지신에게  올리는  고유제
                  를  지내도록  하였다.  정조는  고유제의  절차와  참여  인원까지  직접  지시하고,  고유문
                  을  직접  지었다.  수원부사를  헌관으로  삼고,  중군과  읍내  당상관을  지낸  조관(朝官)
                  을  아헌과  종헌으로  삼았다.  현재는  독산성문화제  때  약식으로  재현  시행해  오고
                  있다.

                    경기  남부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던  독산성은  성  내에  수백호의  민가가  거주하는
                  생활공간이기도  하였고,  15개  건물에  167칸이  넘는  관청이  들어서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보적사,  세마대  2곳만  남아  있다.
                    현재  독산성은  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55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