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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올림픽대회에 본부 임원에 이상백(李相栢), 마라톤에 김은배(金恩培 6位)와 권태하(權泰夏 9位),
권투에 황을수(黃乙秀 예선 탈락) 등이 참가하였으며, 1936년 제11회 독일 베를린 올림픽대회에 마라
톤에 손기정(孫基楨 :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과 남승용(南昇龍 : 2시간 31분 42초 4.)은 금
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긍지를 드높였다. 또 일본 선수단 본부 임원(총무)에 이
상백(李相栢), 농구에 염은현(廉殷鉉), 이성구(李性求), 장이진(張利鎭), 권투에 이규환(李奎煥), 축구
에 김용식(金容植) 등이 참가하였다. 1936년 손기정, 남승용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
에 실었다 하여 동아일보는 폐간되고 관계자들은 형무소에 가게 되는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일어나기
도 하였다. 그 후 일제의 박해가 더욱 심해지면서 1938년에는 많은 체육 단체들이 강제로 해산되었으
며, 우리 민족의 체육활동도 많은 제약과 탄압을 받게 되어 자유로운 체육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다만 일제에 충실한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훈련 종목만으로 체육활동이 강요되었다.
2. 일제강점기의 오산 체육
일제의 탄압으로 우리나라 체육활동이 침체의 늪에서 활성화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산의 체육
활동은 그나마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었다.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의 개
교로 76명의 학생들이 근대교육과 체육을 접하게 되었다.
1917년 9월 15일 추계운동회와 10월 15일부터 매주 토요일 전교생의 원거리(遠距離-군사훈련 일부
로 실시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행군을 실시함으로써 학생들은 물론 지역주민들도 체육활동의 의
미와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1935년 8월 13일 오산에서 체육에 관심 있는 인
사들이 오산체육회를 창립한 것이다. 임원의 구성은 회장 박성덕(朴性德), 부회장 홍정헌(洪禎憲), 간
사 공석환(孔錫煥), 한동수(韓東洙), 감사 강우일(康祐一), 이인오(李仁悟), 운동부장 김오룡(金五龍),
서기 겸 회계 김경기(金敬基) 등이다. 그리고 그해 8월 25일 제1회 중조선축구대회를 오산체육회 주
최로 오산에서 개최한 일이다. 이런 일련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시민들이 축구를 사랑하게 되고, 지금
도 오산의 체육활동으로 축구를 으뜸으로 생각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제강점기에 오산의 체육활동상을 그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사로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되리라 생
각한다.
• 1921년 06월 08일 수원유년 동맹군과 오산 유년군 축구전
오산시사 • 1925년 08월 12일 오산·병점 축구시합(오산)
• 1927년 06월 14일 수원에서 개최된 정구대회에서 오산군 대승
• 1927년 07월 06일 오산에서 기호소년정구대회 개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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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 1929년 08월 10일 오산 각희(角戱-씨름:각저 角觝·角저)대회
• 1929년 08월 26일 오산씨름대회 주최
• 1929년 10월 06일 광성학원(현 광성초등학교) 추계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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