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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01월 29일 제1회 얼레공대회(격구擊毬) 주최 199
(※ 얼레공이란 수원에 내려오는 민속놀이로서 『고려사절요』, 『용비어천가』, 『경국대전』, 『무예도보 문화
통지』, 『대전회통』 등 많은 사료에 격구(지금의 필드하키 경기와 비슷)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제강점 · 예술
기인 1931년 2월 5일 수원군청소년동맹 주최로 전국 <얼레공대회>가 민족 봉기와 대동단결의 공동체
결성을 목적으로 서탄면 황구지리에서 전국 32개 팀이 참가하여 수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 체육
열리기도 했다.) / 교육
• 1932년 09월 30일 오산공립농잠실습학교 추계대운동회 / 종교
• 1933년 01월 26일 오산척사대회(동아일보 수원지국 개최)
• 1933년 10월 04일 광성학교(현 광성초등학교) 추계운동회
• 1933년 10월 07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추계운동회
• 1935년 08월 13일 오산체육회 창립
• 1935년 08월 25일 제1회 중조선축구대회 오산체육회 주체
• 1935년 08월 29일 오산축구대회 개최(경성 연안군延安郡 우승)
• 1936년 08월 02일 제2회 중조선축구대회 오산체육회 주최(2, 4, 6일 – 3일간)
3. 광복 이후의 오산 체육
1) 전국축구대회 주최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체육 부문도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국가의 모
든 체제가 불안한 상태에서 군국주의 체육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하는 반면, 학교 교육이 점차 안정되
면서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체육 수업도 활성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사회체육도 조금씩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오산의 체육활동도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오산도 이상설 씨를 비롯한 뜻 있는 지
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오산체육회’의 조직 정비를 서두르고, 그해 10월 30일에 조국광복경축 제1
회 전국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남촌은 성호초등학교 운동장밖에 없고 좁아서 성인 축구를 할
수 없어, 일제강점기시대 경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하던 오산천 둔치(오산시민회관-현 오산복합문화
체육센터 자리)에 훌륭한 잔디로 된 공간이 있어, 그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10개 팀이 참가해
경기를 하였다. 아직 오산체육회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승기에는 ‘주최 오산체육회’라 명시하
였으며 당시 오산의 저력으로는 가히 모험적인 행사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제2회 전국축구대회(대회장 최병국)에는 전국에서 18개 팀이 참가하여 성대하게 대회가
열렸다. 특히 전국의 많은 팀이 참가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천연 잔디로 된 경기장이고, 또 선
수들도 맨땅보다는 상대적으로 부상의 위험이 적기 때문에 참가하는 선수들도 매우 만족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