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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내려면 생기복덕을 보아 사람들을 선출하였다. 당주는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택하는데
                  당주가 되면 일주일 동안은 바깥출입도 안 하고 가급적 한 집에만 머물렀다.

                    산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당주와 심부름하는 사람 세 명이 올라간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도 부정
                  이 없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는 아래까지는 갈 수 있었으나 제장(祭場)에는 들어설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제보자께서 클 때에는 산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마을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거

                  의 다였는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아서 제대로 지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제보자 이기호
                  어른의 아버지께서 산제사를 주관하실 시절에만 천주교를 믿는 분들도 함께 산제사에 참석하셨던 것

                  으로 기억하고 있다.
                    술은 전날 당주집에서 빚는다. 그리고 밤 12시에 제사를 지냈다. 제물은 과일과 백설기시루떡, 소

                  머리 큰 것 하나, 포와 적을 올렸다. 당우물이 있어 제사에 올린 음식은 당우물로 준비하였다.





                  12) 서동

                    서동의 마을제사는 두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제사이고
                  하나는 유씨들이 중심이 되어 행하는 제사였다.
                    먼저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마을제사는 20여 년 전까지 전승되었다. 당제사는 음력 10월 보름

                  에 지냈는데 정남면 음양리를 넘어가는 고개에서 산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돼지 한 마리를 잡고 떡도

                  한 시루를 해서 상도 안 당하고 부정도 없는 제관 두 사람이 지냈고 축문도 있었다고 한다.
                    글자가 네 자씩이었으며 그 내용도 많았다고 하며, 축문의 내용은 마을이 잘 되게 하여달라, 농사
                  를 잘 짓게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한편 마을 뒷산을 면화산이라 하는데 이곳에서도 산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여기는 유씨 집성촌이

                  므로 실질적으로 유씨들이 중심이 되어서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 주로 가운데 앉아서 옆에서 술잔 따라주는 사람이 있고 가운데 앉아서 받는 사람이
                  첫째 주관이고 축관이 따로 있다. 이렇게 꼭 세 사람이 제사를 지냈는데 각각 축관, 제관, 그리고 술

                  을 따르는 사람을 헌관이라 하였다고 한다. 산제사를 지낼 때 술은 누룩과 엿기름으로 만들었고 조라

                  라고 하였다. 떡은 안 하고 북어포와 과일 서너 가지와 통돼지만 올렸다고 한다. 비용은 따로 걷지 않
                  고 동네 기금으로 충당하였으며 동네 우물은 있었지만 우물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오산시사


                  13) 서랑동
      제

      6             (1) 산제사
      권
                    서랑동에서도 시월 상달 보름을 전후하여 산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전승이 끊긴 지는

                  꽤 오래라 한다. 당집은 없었고 소나무를 위하였으나 이도 지금은 고사가 되었으며 그 흔적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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