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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러낸 백성들이 아닌가!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면 도리어 살 길이 있을 것이다.                       35)



                    김천일의 호소로 죽기를 맹세한 병사들은 한 사람의 도망자 없이 충청도에 이르렀고, 그 숫자
                  는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양을 향해 올라오던 김천일 부대가 공주를 지날 때에는 조헌(趙憲,

                  1544~1592)이 찾아와 기병 문제를 상의하고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6월 23일 약 3,000명
                  의 김천일 병력이 수원 독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용인전투에서 대승한 왜군은 인근 지역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
                  고 있었고, 겁에 질린 백성들은 왜군에 귀부하거나 적과 내통하는 자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하

                  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조선군의 정보 및 군사와 군량의 확보
                  등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김천일의 부대 역시 용인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것은 물론 산
                  성에서 고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산성에서는 위기 탈출의 방법으로 충청도에서 의병을 모집

                  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의병을 모아 이동경로를 막고 있는 왜적을 소탕하고,
                                                                            36)
                  원군인 고경명의 의병이 북상하는 길을 확보해주기 위한 작전이었다.  김천일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
                  기 위해 진중의 의견을 수렴하여 송제민을 호서로 내려보내 격문을 돌리고 의병봉기의 촉구를 결정
                        37)
                  하였다.  그리하여 송제민은 수원에서 김천일과 헤어져 충청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김천일은 산성 외부 지역과 비밀스러운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 외에도 산성 내에서 왜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들을 처단하여 나약해진 민과 군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독산성

                  일대의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김천일의 수원 주둔은 지역민들의 안정과 민심 수습에 상
                  당한 효과가 있었다. 또한 수원부사를 역임하던 시절 그의 치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 의병

                  지원자가 증가하면서 독산성의 군세가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김천일은 수원부사를 역임했던 경험으로 독산성 일대의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날쌘 군

                  병을 모집하여 유격대를 4대로 편성한 다음, 기습작전으로 인근 지역의 왜군을 공격하였다. 현재 독
                  산성 서쪽의 봉담면 일대인 금령(金嶺)에서는 김천일 부대의 유격대가 게릴라 작전을 벌여 왜군을 물

                  리치고 병기와 군마 등의 군수물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 무렵 김천일은 병마 2만을 인솔하여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던 전라병사 최원에게 사람을 보내 군

                  대를 연합하고, 전라관찰사 이광에게 군대를 요청하여 원군과 함께 합세하였다. 그러나 관군 도망자
                  가 속출하면서 작전을 성공하지 못한 채 안산을 거쳐 강화도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오산시사          수원은 삼도의 근왕병과 이후 김천일의 독산성 주둔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 비해 큰 피해 없이 전쟁
                  을 이겨내고 있었다. 9월에는 안성 의병 출신 홍계남이 수원 판관에 임명되었다. 전쟁 기간 중이었지

                  만 부사와 판관을 동시에 임명하는 것은 수원의 군민과 창고가 넉넉하여 한양의 울타리가 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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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健齋集』 卷3, 行狀.
                  36) 趙湲來, 「金千鎰의 의병활동과 그 성격」, 『임진왜란과 湖南地方의 義兵抗爭』, 아세아문화사, 2001, 122쪽.
    140           37) 김덕진, 「海狂 宋齊民의 학문성향과 의병활동」, 『역사학연구』 44, 2011,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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