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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년(1592) 4월 14일. 일본은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137
시작하였다. 병력과 무기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조선군은 5월 7일 국왕이 자리를 비운 한 역사
양을 일본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6월 13일에는 평양이 함락되면서 조선 땅 대부분이 왜군에게 장악 / 유적
되었다. 북쪽의 압록강 일대에서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이 왜군과 대적하고 있었다.
남쪽 바다에서는 전라도좌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하고 있었지만 · 유물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즈음 전국 각지에서는 유생들이 농민들과 연합으로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삶의 터전인 향촌
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의병의 봉기는 유학자들이 많았던 경상·전
라·충청에서 활발하였는데 현재 오산을 포함하는 수원부 일대에서도 유생과 농민들이 참여하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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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조직되어 왜군에 저항하였다. 수원부 일대는 한양의 남쪽을 방어하는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
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수원부의 상당부분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이에 비해 오산의 독산성은
왜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조선군의 근거지로 자리 잡게 되었고, 그 결과 독산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교과서 구실을 하였던 주요 승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독산성 전투에 앞서 선조 25년(1592)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원부의 주산인 광교산 일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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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광교산 일대는 수원·용인·시흥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한양을 찾기
위해 북상하던 전라·경상·충청도의 근왕병(勤王兵) 약 5만명이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삼도의 근왕병들은 5월 26일 진위 들판에 모여 전의를 가다듬고 6월 31일 독산으로 옮겨 수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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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을 치고 있던 왜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수원의 광교산과 용인의 문소산에서 치러진 전투
는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전쟁 초기에 겪은 패배였지만, 그로 인해 이후 독산성 전투의 승전을 가져
오는 굳은 다짐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해 12월에 치러진 독산성 전투는 전라도순찰
사 권율(權慄, 1537~1599)이 이끄는 병력과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의병 부대의 연합전으로 한
양 수복을 위한 육지 전투의 첫 승이었다.
6월 용인전투에서 5만명의 남도근왕병이 궤멸당한 후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던 권율 부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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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당시 독산성을 비롯해 오산을 포함하는 수
원부 일대에서의 전투는 대체로 의병부대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권율 부대 외에 김천일 병력은
3,000명, 전 수원현감 우성전(禹性傳, 1542~1593)이 이끈 병력은 초기 2,000명에서 5,000명으로 증
원되었고, 홍계남(洪季男) 병력은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수원 유생 최흘은 농민과 유생들로 구
성된 의병을 이끌고 수원을 중심으로 안성·강화·인천 등에서 활약하였다. 31)
특히 김천일은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라병사 최원(崔遠)과 합세하여 독산성에 주둔하
였다. 김천일 부대는 대부분이 유생과 농민들로 구성되었는데, 북상하는 도중에 각 지역에서 관군과
27) 『오산시사』 1, 제2편 역사, 121쪽.
28) 『오산시사』 1, 제2편 역사, 122쪽.
29) 『燃藜室記述』 券15, 宣祖朝故事本末.
30) 심승구, 위의 논문, 128~129쪽.
31) 『오산시사』 1, 제2편 역사,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