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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판단하고 있던 것을 보여준다. 이후 9월 21일에는 경상도 방어사와 진주목사를 지낸 조경(趙儆, 141
1541~1609)이 부사로 임명되어 독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수원부 방어를 지속해 나갔다. 역사
3) 권율의 독산성 전투 / 유적
독산성은 한양과 호서·호남지방을 이어주는 육상 교통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산성으로 정상에 · 유물
오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호남에서 대군을 이끈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한 것은 선조 25년(1592) 10월이었다. 이에 앞서 권율은 이광의 근왕병으로 용인일대의
전투에서 패전한 후 전라도로 회군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8월
에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라도로 진군하려던 일본군
을 저지하는데 공을 세웠다. 38)
승전의 경험으로 자신감을 높인 권율은 휘하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과 1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군대를 재정비하였다. 근왕을 목적으로 북
상하던 권율 부대는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오산의 독산성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은 이광의 근왕군으로 용인을 포함하는 오산과 수원 일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몸소 체험한
경험으로 인해 독산성을 부대의 주둔지로 선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는 권율에게 개성의 왜군을 무찌를 것을 지시했으나, 이 일이 여의치 않자 그해 11월 곧바로 한
성을 공격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는 권율이 북진하여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후방의 군대와 연락 및 보급
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12월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2만여 명을 독산성으로 급파하였다. 수원
일대에 도착한 왜군은 3진으로 나누어 독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성 밖으로 유인하거나 성을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율은 산성에 주둔한 채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응전하지 않았다. 전면전에
나선 왜군에게 위기감을 느낀 권율은 양남도체찰사 정철(鄭澈, 1536~1593)과 강화도에 머물고 있던
전라병사 최원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권율은 휘하의 부대가 철저하게 지구전을 통한 방어
전을 수행하며 일본군에 대응하지 않고 철수를 유도하였다.
12월에 들어설 때까지 왜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권율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성곽을 방어
하기에 힘썼다. 훈련된 병사를 이용하여 퇴각하는 일본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원활한 후퇴를 방해하
39)
거나 소규모로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왜군은 조선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공격하였으나, 권
율 부대는 응하지 않은 채 주로 야간을 틈타 공격하였다.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밤이 되면
정예부대인 기병들이 북문을 열고 불시에 돌진하여 적진에 궁시(弓矢)를 퍼붓고 오거나, 힘 좋은 병
사들은 도끼와 창 등을 가지고 나가 잠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왜군을 제거했다. 또한 거화(炬火)와 나
각(螺角)으로 적진을 에워 쌓은 후 소란작전을 펴서 잠을 못 자게하고, 급수(汲水)와 연료병(燃料兵),
38) 유연성, 「임진왜란기 한성 주변 전투의 전략적 의의」, 『韓日關係史硏』, 2014, 97~98쪽.
39)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12월 1일(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