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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병(哨兵), 감시부대를 기습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독산성 외곽에서는 의병들이 모여들어 기
치를 들고 금고(金鼓)를 울리며 주야로 돌면서 견제 작전을 펼쳐 후방을 차단하는 작전을 펴나갔다. 40)
이에 비해 왜군은 오산과 청회(靑回)지역에 3진으로 나누어 진을 쳤다. 왜군들은 길가 요충지에 좌
우를 통제하고 장애가 없어 환히 바라보이는 곳에 부대를 배치하였다. 또한 산에는 초목이 없고, 형
세가 볼록하게 나오고 사면이 민둥민둥하여 막힌 데가 없는 곳을 찾아 진을 쳤다. 이는 조선의 지형
조건에 능숙하지 못한 왜군이 진퇴가 용이한 곳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군은 5일 동안
계속해서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3개의 진을 모두 불태우고 과천을 거쳐 한양으로 퇴각하고 말
았다.
독산성 전투는 조선군이나 일본군이나 군사적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신들의 목
표를 이루지 못하고 퇴각함에 따라 한양의 남부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하게 되
었다. 그 결과 경기도 곳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한양 주변으로 철수하여 오히려 조선군에게 포
위당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또한 조선군은 독산성 전투의 승리로 인해 일본군을 한양에 묶어두고
한양 주변에서 긴밀하게 연락하며 대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경기도 내에 머물면서 권율의 군사를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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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군이 멀리 나가 땔나무를 마련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러한 유격전 형식의 독산성 전
투 승전 방식은 경기도 곳곳에서 재현되면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독산성에서 권
율의 전투가 갖는 주요 의미는 당시 군병들이 전라도 근왕병 외에도 수원부 백성들이 의병으로 참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독산성에는 그 일대에 사는 백성들이 들어가 산성을 지켜 적이 감히 침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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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권율 휘하의 부대 4,000명 가운데 약 1,000여 명이 수원부의 사람들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해 9월 수원부사에 임명된 조경이 수원부의 군사를 이끌고 권율 휘
하로 전투에 참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권율은 12월 독산성 전투가 종료되자 이듬해인 1월 중순까지 독산성에 머물다가 2,300여 명
의 군사를 이끌고 고양군(高揚郡) 행주(幸州)의 성산(城山)으로 이동하여 계속해서 왜군에 항거하였
다. 권율이 독산성에서 철수한 이후 왜군들은 한강 이남의 사평원(沙平院, 현재 광주)에서부터 충주
와 음성을 거쳐 죽산(竹山)에 이르기까지 협공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에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방
어선을 재정비함에 따라 강화도에 있던 우성전이 군사 400명을 이끌고 수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독산성은 전투 이후 양천, 행주산성과 함께 한양을 에워싸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주요 거점의 역할
을 맡게 되었다. 결국 2월 25일에는 충청 감사 허욱(許頊, 1548~1618)과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오산시사 독산성으로 들어와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3일 후 허욱이 충청도로 내려감에 따라 독산성은 전라 병
사 선거이가 홀로 지키게 되었다.
한편 권율의 독산성 전투는 세마대(洗馬臺) 전설을 낳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우키타 히데이에(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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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40) 심승구, 위의 논문, 137쪽.
41) 『선조수정실록』 권27, 선조 26년 2월 1일(병술).
142 42) 『선조실록』 권82, 선조 29년 11월 13일(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