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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규모의 의병들이 투속(投屬)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김천일이 수원부에 도착하였을 때는
수원부사를 지낸 그의 경력으로 인해 의병지원자가 더욱 확대되어 3,000여 명의 병력이 될 수 있었
다. 이 과정에서 오산을 포함한 수원부의 다수 농민들도 독산성 전투에 참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전 수원현감을 지낸 우성전은 현재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출신의 유학자였다. 그는 수원부 출
신의 유생과 농민 2,000여 명을 모집하여 추의군(秋義軍)이라는 의병을 조직하고, 김천일 부대와 함
께 연합작전을 펴는 활약을 하였다. 현재 오산의 독산성, 화성 봉담의 삼천병마골[三千兵馬洞], 수원
의 광교산 등을 포함하는 옛 수원부 일대는 왜군과 싸웠던 전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이다.
2. 독산성 전투
1) 임진왜란 초기의 독산성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육로와 해
로를 이용하여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육로에서는 두 개의 길이 선택되었는데 하나는 경상도에서
충청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오는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호남을 거쳐 충청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경
로였다. 여기에 해로를 통해 물자와 군수품을 보급하는 형태로 진격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경상도에
서 출발한 육로의 군대가 연전연승을 하면서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5월 정암
진 전투, 7월 이치 전투, 10월 진주대첩 등에서 계속 패전하고, 해전에서는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면
서 호남과 해로를 통한 한양으로의 진출길이 막히게 되었다.
왜란 당시 오산과 수원일대는 한양으로 북상했던 왜군의 3가지 이동 경로에서 제외됨에 따라 왜군
의 직접적인 침략의 피해를 비껴갈 수 있었다. 당시 왜군의 육지 이동 경로는 <부산–대구–충주–
용인–한양>으로 이어지는 중로와 <김해–성주–청주–용인–한양>으로 연결되는 서로 중 하나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한양으로 이동하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용인을 그들
의 주요 거점지역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용인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교
통의 요지였던 수원은 왜군의 피습 대상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원이 막히면 호서와 호남에서
상경하는 근왕병의 이동을 저지시키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앙에서는 수원의 독산성을
삼남지방의 근왕병들이 주둔하거나 북상하는 주요 거점으로 확보해야만 했고, 왜군은 이와 반대로
이 지역을 손에 넣어야만 한양으로의 진출이 한결 쉬어지는 것이었다.
오산시사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임진왜란 중 독산성이 군사적 거점으로 선택된 것이다. 전쟁 초기 독산성 일
대에는 전라·경상·충청의 3도 근왕병(勤王兵)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수원일대에 도착한
근왕병은 6월 3일에 도착한 전라감사 이광(李洸, 1541~1607) 휘하의 군사들이었다. 이때 모여든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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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병들은 전라·경상·충청을 아우르는 삼도의 근왕병들로 모두 5만여 명이 모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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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원에는 소수의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조선군의 위세에 압도되어 용인쪽으로 퇴각하
였다. 그 결과 삼도의 근왕병들은 별다른 싸움 없이 수원을 탈환할 수 있었고, 근왕병들은 다음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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