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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노력과 비용이 갑절이나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역시 객사의 기문
에 “진위는 작은 고을로 2도의 요충이 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사신과 빈객의 왕래로 말발굽과 수레바
14)
퀴가 서로 엇갈렸다.”는 기록에 의해 당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교통의 요지였음이 확인된다.
또 하나는 세종 13년(1431) 수원부에 판관을 파견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확인되는 오산지
15)
역의 기록이 주목할 만하다. 도호부의 속현 중 하나인 영신(永新)을 떼어내려다가 세종 6년(1424)에
진위현의 청호역을 얻은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오산지역이었던 진위현은 삼남지방과 서울을 오고가
는 관리들의 교통로였다. 이로 인해 진위현에서는 관리의 행차를 영접하는 일 때문에 폐단이 심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청호역이 수원부에 내속되면서 진위현의 사정이 더욱 어려
워지게 되자 수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진위현으로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청
호와 영신을 어느 지역에 속하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계속되었고, 청호는 결국 세종 20년(1438)
수원부에 속하도록 결정되었다. 16)
오산시사
그림 1. 영신과 청호-《동여도》 15책 4열
제
2
권
14) 『오산시사』 1, 제2편 역사, 117쪽.
15) 『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 11월 5일(병인).
134 16) 『세종실록』 권80, 세종 20년 3월 15일(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