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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감소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133
하지만 『수원부읍지』와 『호구총수』에 의해 정조대 오산에 속해 있던 면(面)의 호구수와 인구수를 알 역사
수 있다. 다음은 위 두 자료에서 확인되는 18세기 말 오산의 호구와 인구 현황을 정리한 표이다. / 유적
표 4. 정조대 오산 관할 면의 호구수와 인구수 · 유물
『수원부읍지』(1789년 이전) 『호구총수』(1789년)
인구[口] 인구[口]
호구[戶] 호구[戶]
남 여 남 여
산성면 241 363 424 249 363 424
초평면 265 575 506 265 575 506
청호면 338 561 403 316 461 503
어탄면 274 461 351 274 361 351
시봉면 - - - 215 241 412
삼미면 - - - 322 703 755
삼며곡면 322 713 745 - - -
2,673 2,429 2,704 2,951
총계 1,440 1,641
5,102 5,655
위의 표에 의하면 초평면과 어탄면은 호구나 인구의 변화가 없었고, 산성면은 호구수가 증가하였
지만 인구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청호면은 호구수가 줄어들고, 인구는 남녀의 증가와 감소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 규모는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삼며곡면은 삼미면으로 마을이름이 변경되었을
뿐, 남녀 인구의 증감을 반영한 결과 청호면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규모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수원 신읍이 조성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새로운 시봉면이 추가됨에 따라 18세기 말 오산지역은
전체 6개의 면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호구는 201호, 인구는 553명이 증가하여 마을의 규모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마을의 인구 증감은 역도(驛道)체계에 의한 육상 교통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현재 오산시 일대
는 조선전기 수원도호부 남쪽의 직할 지역과 진위현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당시 수원부의 남
쪽에는 영신역과 청호역이 운영되면서 한양에서 진위를 거쳐 천안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오산 일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실록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기록은
매우 유의미하다.
13)
청호역은 남쪽 진위현의 영신역과 함께 사신이나 과객(過客)의 왕래가 빈번하던 곳이었다. 태종
대 문신인 하륜(河崙, 1347~1416)은 진위현의 객사 중수기에 “진위는 큰길 옆에 있어 다른 고을에 비
13) 『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 11월(병인). / 권60, 세종 15년 6월 23일(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