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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산성의 봉우리가 무덤의 혈상(穴上)에서 바라보여 가까운 거리인 것 같지만 10리 정도 떨 149
어져 있고 연화(煙火)의 기운이나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무기를 저장해 둔 것도 이해 역사
(利害)를 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독산성이 사도세자가 살아생전 유숙(留 / 유적
宿)하였던 점을 인지하고 산성 훼철에 관해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독산성은 영조 36년(1760)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을 다녀오는 온행(溫行) 길에 하룻밤을 머물렀던 · 유물
곳이었다. 사도세자 일행은 당시 장마로 인해 황구지천의 물이 불어 세람교(細藍橋, 오산시 세남로)
를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에 올라 유숙하게 되었다. 산성에서 하룻밤을 지낸 사도세자는 진남루
에 올라 활쏘기를 하였다. 그리고 산성을 돌며 주위를 살펴본 후 “이 성은 들 가운데 이와 같이 우뚝
솟아올랐으니, 적이 만약 이를 멸시하고 가벼이 침범할 때는 낭패를 할 것이다. 권율의 대첩은 본래
이러해서이다.”라고 하며 독산성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또한 창고에서 20석의 곡식을 꺼내어 호위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독산성의 민인들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56)
그림 5. 세람교와 독산성-《해동여지도》, 〈수원부〉(1735년)
정조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자신이 산성을 직접 살펴본 후, 독산성의 존폐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
다. 정조 14년(1790) 2월 현륭원 원행 길에 독산성에 오른 정조는 장대(將臺)와 운주당(運籌堂)을 둘
러보고 산성 주변에 사는 부로(父老)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도세자와의
경진년 기억을 묻고, 당시 부친이 창고를 열어 산성의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사실을 듣고 감
회에 젖었다. 또한 30년 전 돌아가신 부친의 온행에서 은전을 입은 백성을 찾아내어 특별히 가자(加
資)하였으며 성내의 백성들에게는 쌀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신읍으로 이전한 수원부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을 아직 갖추지 못한 점과 사도세자의
옛일을 기억하며 독산성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명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산성의 누각인 진남루
(鎭南樓)에서 활쏘기를 하여 4발을 적중시켰다. 이때 독성중군(禿城中軍) 유이주(柳爾冑)의 직책을
올려주고, 영접군교(迎接軍校)들에게도 시상하였다.
56) 『화성지』 권2, 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