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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친림(親臨) 이후 정조 17년(1792) 독산성은 여름 장맛비에 성첩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게 되
었다. 성첩의 반 이상이 무너져 내렸는데, 특히 산사태가 난 곳 중 원소에서 직접 보이는 곳이 4곳이
나 되었다. 정조는 빠른 시간 안에 보수 공사를 명하였다. 독산성의 수축에 필요한 물력을 미리 구획
하고, 공역에 앞서 토지신에게 올리는 고유문을 짓는 것은 물론 고유제의 절차와 참여 인원까지 직접
지시하였다. 그 결과 7월 25일부터 시작한 공사는 약 70여 일 만에 마무리되어 옛 모습을 갖추게 되
었다. 정조에게 독산성은 아버지의 무덤을 지켜주는 든든한 산성인 동시에 아버지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2. 화성 성역과 신도시 건설
1) 신도시의 시작
정조 13년(1789) 팔달산 아래로 수원부 읍치가 이전하였다. 그리고 옛 수원부 읍치자리에는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정조는 이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무덤이 들어서는 지역
에 거주하던 수원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무덤이 조성되는 곳
은 옛 수원부 읍치였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살아가던 수원 부민들의 거주 지역이었다. 이들이 이주하
는 새로운 주거지는 현재 수원의 팔달산 아래 마을이었다. 삶의 터전이었던 정든 집과 조상의 묘소,
평생을 바쳐 일궈왔던 논과 밭을 뒤로하고 낯선 마을로 옮기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
다. 이에 팔달산 아래 마을로 이전하는 백성들이 빠른 시간 안에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
도록 다양한 정책이 마련되었다.
정조는 수원부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특별 조치를 시행하였다. 첫째, 수원부에 맞닿아 있는
광주부의 일용면(一用面)과 송동면(松洞面)을 이속시켜 수원부를 확장하였다. 둘째, 수원부에 구금
되어 있는 모든 죄수를 특사로 석방하고, 수원부민으로 유배 중에 있는 사람들도 귀환시켰다. 셋째,
현륭원 인근의 면리(面里)와 신읍으로 이주하는 백성[民人]들에게 10년 동안 면세 혜택을 주고, 특정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하는 복호(復戶) 500결을 지급하였다. 당시 신읍으로 이주할 민호는
244호(戶)였는데 이주 가구의 주인[家主]·역(役)·성명 및 주택의 칸수 등 각각의 조건에 따라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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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을 포함하는 넉넉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수원부민들에게 최대한의 혜
택이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오산시사 이렇게 팔달산 아래 자락에 수원부 관아를 비롯한 신읍이 형태를 갖추게 되자 이듬해인 정조 14년
(1790)에는 현륭원과 멀지 않은 곳에 사도세자의 혼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
였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을 달래기 위해 현륭원 가까이에 원찰(願刹)을 세우기로 한 것
제
2 이다. 그러나 정조 즉위년(1776) 6월 대사간 홍억(洪檍)의 상소에 따라 사사로운 개인의 원당을 모두
권
150 57) 최홍규, 『정조의 화성건설』, 일지사, 2001,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