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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정조는 태어난 세손이 15세가 되는 갑자년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려
고 본인은 상왕으로 물러나 칠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으로 내려가 노후를 보내고자 하였다. 이러
한 계획에 따라 새롭게 조성한 부친의 묘소가 자리한 수원에 조선 최대 규모의 지방 궁궐인 화성행궁
도 함께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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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화성행궁은 신읍의 관아로 건립되었다. 물론 정조가 꿈꾸던 신도시 구상에는 신읍의 관아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하는 노후의 근거지로 설계되었을 것이다. 이에 화성행궁 조성 사업은 화성 신
도시 구상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매우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정조 13년(1789) 9월 신읍의 관아 공사가 1차로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정조 14년(1790) 2월에는
동헌인 장남헌(壯南軒), 내당인 복내당(福內堂), 사정(射亭)인 득중정(得中亭)이 완공되어 각 건물마
다 정조 어필의 현판이 내 걸렸다. 수원부 공해를 포함한 공사는 약 10개월 동안 이어져 5월 초에 완
공되어 성대한 낙성연이 베풀어졌다. 이후 정조 18년(1794)에는 이듬해 치러질 혜경궁의 회갑연에
서 펼쳐질 다양한 행사에 대비하여 행궁의 기존 건물이 증개축되거나 신축되었다. 그리고 정조 20년
(1796)까지 주요 건물들을 이어주는 행각들이 채워짐에 따라 화성(華城)의 완공과 함께 576칸이라는
조선 최대 규모의 화성행궁도 완성되었다.
2) 화성 성역의 우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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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신도시 사업의 정점은 화성(華城) 건설이었다. 화성 건설은 정조 18년(1794) 1월에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 10월까지 총 34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화성 건설이 시작된 그해 7월 여름은 무
더위로 인해, 또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얼음이 녹을 때까지 약 6개월간 공사가 중단되어 실제로는
28개월 만에 완공된 셈이다. 본래 계획은 10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정조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의
부단한 노력과 건설 사업에 참여한 백성들의 힘이 모아져 3년여의 짧은 기간에 완공될 수 있었다. 18
세기에는 도시로 인구가 모여들고 재화가 쌓여가던 시대였다. 도시는 경제활동의 거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화성은 이렇게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상업도시의 요구에 부응하는 신도시의 성곽
으로 축조되었다.
수원에 성곽을 쌓는 일은 팔달산 아래 신읍이 조성되고 관아를 비롯한 각종 토목공사가 마무리되
던 정조 14년(1790) 6월 강유(姜遊)의 건의에서 출발하였다. 현륭원이 조성되고, 용주사가 창건되고,
신읍에는 수원부 관아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감에 따라 수원 성곽 축조에 대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
하였다. 축성 여론이 구체화되면서 정조는 신진학자들에게 성곽을 축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할 것을 명하였다.
오산시사
당시 이 일을 맡은 이가 바로 젊은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었다. 정약용은 중국의 성
제 및 중국을 통해 들여온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을 탐구하여 새로운 기술을 고안하였다. 그 결과 정조
제
2 16년(1792) 조선에 맞는 성곽 축성안인 「성설(城說)」이 마련되었다. 이 축성방안은 성의 치수·축성
권
59) 김선희, 『수원의 궁궐, 화성행궁 이야기』, 자유로운 상상, 2019.
152 60) 김동욱,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 돌베개, 2002. - 이하 화성건설에 관한 서술을 이 책을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