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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하고 있었다. 정조는 조선사회의 전통적 지배이념인 주자학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명                                           151
                  복을 빌어주기 위한 마음은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원당철폐령을 철폐하고 현륭원이 조                                           역사

                  성된 이듬해 2월 19일 첫 삽을 뜨고 주춧돌을 세우는 것으로 용주사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0월 완공                                        /  유적
                  하게 된 것이다.

                    팔달산 아래 마을에 마련된 신읍 공사는 수원부의 관아를 짓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몇 년에 걸쳐                                          · 유물
                  제 모습을 갖추게 된 수원부 관아는 화성 건설에 앞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조는 정조 17년

                  (1793) 1월 원행에서 팔달산에 올라 신읍 수원을 바라보며 화성 신도시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다. 새롭
                  게 조성되기 시작한 도시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명명하여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승

                  격된 유수(留守)는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
                  관아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는 어필(御筆)의 현판을 내걸도록 하였다. 현륭원 이장으로 시작된

                  5년여의 신도시 건설 사업이 일단락되었다.








































                                                 그림 6. <행궁전도>-『정리의궤』


                    그리고 이듬해인 정조 18년(1794) 1월 수원에서는 조선후기 최대 규모의 토목사업인 화성건설 공사
                  가 시작되었다. 화성건설은 갑자년[1804년]을 목표로 하는 10년 계획으로 구상되었다. 정조는 화성

                  이 완공되는 갑자년이 되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가 노후를 보내려는 ‘갑자년구
                                    58)
                  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구상은 현륭원을 이장한 이듬해인 정조 14년(1790) 장차 순조가 되는 세손




                  58) 유봉학, 위의 책,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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