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한미기업인친선포럼 25.9,10월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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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본인은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난 5월 11일을 두번째 생일로 여긴다.상이군인으
로 명예 제대한 후 대전에 정착한 육촌 형의 도움을 받아 대전 우체국 서무과에서 일
하게 됐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입학 공부를 하여 성균관대학교 화학과에 합격
했으나 등록할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했다. 그 이후 상경해서 중앙우체국 서무과에서
일했다.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육촌 형 집에 얹혀 한 평짜리 연탄 창고를 방으로 꾸며
살았고, 그렇게 일하면서 대입 준비를 해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해서 1년을 다니다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55학번으로 편입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우체국 근무
인연을 살려 우표 수출입 업무를 배우고 익혔다.
이듬해인 1962년 6월 내각기획통제관실에 자리를 얻어 중앙청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고등전형 시험을 거쳐 행정사무관 4호봉으로 근무했으며, 당시 박정희 의장에게 발탁
되어 경제개발 계획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일 잘 한다고
인정을 받아서 1966년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파견되어 일했다. 6개월 뒤 서봉균
정무수석이 재무부 장관으로 부임하게 되자, 그를 따라 재무부로 소속을 옮겼다.6개월
만에 재경직 전환 시험을 통과하고 수재들이 모이는 재무부에서 핵심 보직인 이재국
이재2과장을 맡은 게 1967년이었다. 이재(理財) 2과장직을 맡고 보니 요직이자 눈코
뜰 사이 없는 전투직이나 다름없었으며, 저축, 신탁, 은행 관리감독이 주 업무라 군사
정부의 공약사업 실천을 위한 저축 장려와 내자동원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없
이 뛰는 만근(滿勤)으로 사생활을 거의 포기해야만 했다. 서봉균 장관이 떠나고 남덕
우 장관과 김용환 장관이 부임한 시절에도 엘리트 코스인 이재 1과장, 이재국장을 거
쳐 기획관리실장, 재정차관보로 거침없이 승진했다.이재국장 시절부터 당시 살인적인
고금리를 낮추는 데 앞장서는 등 친(親)기업 정책을 폈다. 은행을 새로 만들고 사금융
을 양성화하면서 제도권 금융의 틀을 구축하는데, 경제가 급성장하니 물가는 치솟고
자금은 늘 부족했다. 재무부 소속 관료로서 금리 정책 등을 놓고 경제기획원이나 한국
은행과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그러다가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영문도 모른 채
사표 통보를 받았다. 1980년 5월, 장덕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장이 재무부차관
으로 옮겨 간 박봉환상임위원 후임 자리를 제의하여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으로 옮
겨 앉아있을 때 신군부가 별 이유 없이 그 자리를 그만두라고 해서 해고된 것이다. 그
후 백수시절을 보내다가, 1982년 2월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의 요청으로 중앙투자금융
사장직에 취임하였다.1985년 2월에는신한은행 제2대 은행장을 맡았고, 1988년 2월에
는사공일 재무장관 추천으로 외환은행장을 맡았다. 외환은행장 재임시절 국책은행의
안일한 체질에 젖어있던 직원들을 고객에 봉사할줄 아는 은행원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매섭게 채찍질하였다. 그리고 정/관계 인사들을 상대로 끈질긴 로비끝에 외환은행을 민
영화 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1990년 3월 은행감독원장으로 취임
하면서 관직으로 복귀했다. 1991년 5월 27일 노태우 정부에서 제35대 재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2월 24일까지 재무부장관으로 일하면서, 중소기업 신용대출을 확
대하는 등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