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김해일보163호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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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8월 5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김해일보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이어서>>>






                                                                                                                    김종간의 미친소리 스물 한 번째

             이어서>>>                                           처럼  덕이  있는  임금이었던가?  또한  후일                           은하사는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품은  고찰이
                                                              에 역성혁명을 하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다.  가락국  때  장유화상이  창건하였고  당시
                                                              유덕한 인물이었던가? 분명 역사기록은 그                                의 이름은 서림사 였다고 믿는다. 불교를 가지
                                                              렇지 않았음을 전하고 있다.                                       고 허황옥 공주를 수행해 와서 불교를 전파하
                                                              조선조에  이록을  탐하는  훈척파들이  조정                             며 서역의 모국 번성을 새로운 나라 가락국에
                                                              에  가득하여도  사림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서 기원하며 서림사를 세웠을 것이다. 서림사
                                                              이  출처가  분명하지  않고  심하게는  훈척                            가 왜 은하사가 되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남명이 일찍이 정포은의 출처에 대해 의                           들과 서로 도와 민중을 탐학하고도 부끄러                                대성 큰스님이 1970년대 주지로 부임하여 40
             심을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도 정포은의                           움은 모르고 오히려 상호 후원하는 모습도                                여 년 동안 원력으로 전각 중창과 보수로 도
             한 죽음은 자못 가소로운 것입니다. 공민왕                          나타났다. 그러므로 조선조 유교사회를 부                                량을  넓히며  가락불교의  큰  가람으로  발전하
             조에 대신 노릇을 30년이나 하였으니 ‘불                          정적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는 출처의 비엄                                고 있으니 불향이 꺼지지 않기를 합장하며 새
             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것은 신우부                           정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남명은                               주지  혜진스님께  취운루와  일주문  중창을  기
             자를 섬겼으니 옛 성현의 도리에 가히 부                           구체적인  벼슬살이와  민중을  위한  정치행                             원해 본다.                                             온  가락국사  장유화상의  수도처  장유암이  불
             끄러운 일입니다. 또 추방하는데 참여한 것                          위와 사회적 실천에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                                                                                   향을 따뜻하게 품고 길손을 맞이한다. 장유암
             은 무엇입니까? 10년을 신하로써 섬기다가                          주지  못하고  논의마저  회피하면서도  천리                             불모산 장유암                                            의 최초 창건은 가락국 때로 보고 있으며 임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와 인욕 그리고 이기, 사단칠정 등의 사변                                                                                  진왜란 때 불타 중창하였고 그 후 세월 속에
             차마  가한  일입니까?  만일  왕씨에게서  출                      적인 논쟁을 ‘세상을 속이면서 유명한 선                                불모산은  이름에서  어머니의  포근함과  엄숙                         또 불타 1935년 12월에 중수하였다. 그 후 다
             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이 제                           비라는 이름을 도적질하는 것’ 이라고 보                                함,  먹먹함으로  부처님을  떠올리게  된다.  불                      시 해방을 맞은 후 6·24 전쟁을 거치며 완전
             위에 오름으로 영씨 나라가 이미 망한 것                           고 비판하였다.                                              모와  장유의  이름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비감                       히  소실되었는데  장유와  김해의  불자들이  정
             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아무                                                                                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                          성을 모아 본전 칠성각, 범종 등을 1982년 까
             렇지도 않게 종사하여 그 녹을 먹었습니다.                          정인홍은  남명의  출처를  “선생은  구차하                             의 왕비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시                           지 중층 하였고 본전을 비롯하여 주위를 근대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다른 임금을 위하                          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                                집왔으며 공주가 시집 올 때 공주의 오빠 허                           에 주지 스님과 불자들이 역사에 가람답게 크
             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                           도 않았다. 아는 이는 비록 좋아하나 알지                               보옥이 함께 왔다. 아유타국의 왕자 보옥은 머                          게 중수하였다. 본전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
             가 있습니다.                                          못하는  자들은  자못  치우치게  이를  미워                            나먼 바닷길의 무사 항해를 위해 부처님의 공                           한 높이 241cm의 장유화상 사리탑은 많은 전
                                                              하였다. 은퇴하였으나 시대를 자세히 살폈                                덕을 빌며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와서 수로왕                           화에도  남아  1935년  중창  때  탑을  보호하는
             이것은  단순한  충신과  역적의  시시비비가                        고 스스로를 지켰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자                                의 처남이 되었다. 그러나 허보옥은 부귀영화                           난간을 만들고 「가락고도 장유암 중수비」를
             아니라 출처의 구체적 사례를 철저히 구명                           랑하지 않았으며 깎아지른 요새의 높은 바                                를 뜬구름처럼 보며 산으로 들어가 불교를 설                           세웠으며 사리탑은 1975년 2월 25일 문화재로
             함으로써  정면론적  명분론과  유학의  실천                        위 구멍에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                               경하며 살아 장유불반이라 장유화상이라 부르                            지정되었다.
             적  정치사상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를 일컬어 천 길을 나르는 봉황새라 하면                                게  된  것이다.  수로왕의  일곱  왕자는  장유화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는  1915년  5월에
             이것은 인조의 쿠데타 이후 광해군 때 벼                           가할  것이다.”  라고  가장  적절하고  정확                           상을 따라 불교에 귀의하여 여러 산을 밟으며  주지 선포담이 세웠고 또 하나의 보물이 사에
             슬한  이들의  출처문제와도  관련되는  것이                        하게 표현하였다.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                                수도 증진하였는데 지리산에서 성불하여 칠불                            있으니  화상의  탱화다.  광무  7년에  지리산에
             다. 그러나 과연 고려말의 정치상황이 수명                          았고 침묵하지 않았다’ 함은 구차하게 혼                                이 되었고 장유화상이 장유 한 그 지역은 장                           무주암에서 이곳으로 이안되었으니 반가운 일
             론적 명분을 지킬 때인가, 아니면 혁명성까                          란한 세상에 굽히고 나아가 벼슬살이 하려                                유라고 지명이 되었고, 일곱 왕자를 성불 시켰                          이지만 언제 누가 그렸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
             지  내포한  정명론적  명분을  지킬  때인가,                      고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유학자로서 세상                               다고  그  산을  불모산이라  부른  것이다.  허보                     음이 신비를 더하고 해동 최초의 선승을 진영
             아니면  혁명성까지  내포한  정명론적  명분                        과 정치의 비리와 타락을 보고도 못 본채                                옥이 장유불반한 불도지역은 고려때는 장유촌                            으로 볼 수 있음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장유
             을 주장할 때인가는 이론의 여지가 남는다                           하지 않아 올바른 자세를 지켰음을 말한다.                               이었으나 고종 22년에 장유면이라 개칭되었고  암에 대한 시가 『김해읍지』에 실려 있다. 작
             고 할 수 있다. 또한 주희가 맹자의 혁명적                         그래서 쉽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들은 자                                지금은  장유동이다.  장유사는  장유동  대청리  가는 허의가 지은 금릉팔적으로 본 책자에 담
             정치사상을 부분적으로 지지하면서 내세운,                           기들이 하지 못하는 실천을 남명이 행하자                                불모산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예종  때의  고 있지만 금릉팔적 여섯 번째인 장유암과 장
             “앞의 임금이 걸주처럼 포악하고 뒤의 임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지」에 “불모산 장유사는 선종에 속한                            유암에서  동남쪽  낙동강과  옛  김해평야를  바
             금이 탕무처럼 유덕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다.”고 적고 있고 『김해읍지』는 “장유암이  라보며 노래한 장유암 8경을 다시 불러본다.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 왕위찬탈의 구실                                                                                 김해부 서남쪽 30리 추월산에 있다.”고 적고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과                                                                                있다. 김해에서 가장 높은 산이 창원시와 경계
             연 우왕과 창왕이 걸주처럼 포악하고 위화                                              다음호계속>>>                           했는데 801m의 불모산 713m의 용지봉을 오른
             도 쿠데타 후에 9공신(이성계, 정몽주, 정                                                                               쪽과 왼쪽으로 끼고 있는 산의 상류 중턱에서
             도전  등이  포함)이  옹위한  공양왕이  탕무                                                                            동으로 낙동강과 옛 김해 평야를 시원하게 관
                                                                                                                    망하는  자리에  해동에  최초로  불교를  가지고  다음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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