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5 - 은혜의 70년, 여호와께 돌아가자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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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찬송가 편찬에 주도적 역할
속 교단의 총회장 목사를 만나 통일 찬송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협력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교단 예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
던 찬송가 판매 수익 배분과 기구를 개편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었다. 한국CBMC의 찬송가 통합을 위한 열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
고 교단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국CBMC는 찬송가 공회를 설
17 한국CBMC는 출범 초기부터 중요한 사역 환경인 우리나 립하는 데까지 소요되는 모든 제 경비를 부담하되 일체의 권리를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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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1979년에는 한국 찬송가 통합을 촉구하는
라 기독교 교단의 뿌리 깊은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활동
을 능동적으로 펼쳐왔다. 그중 대표적인 사역이 부활절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했다.
연합예배 재개와 통일 찬송가 편찬 사업이었다. 1981년 한국CBMC 최창근 중앙회장은 그동안 중단되다 시피한 통일
1970년대부터 한국 기독교계는 대부흥의 시기를 맞았다. 대규모 집회 찬송가 편찬 사업을 한국CBMC가 해야 할 사역이라고 확신하고 다 제2장 | 기독교 부흥과 CBMC 사역 지평 확장
에는 수백만 명의 성도가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1973년 빌리 그레 시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각 교단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한
이엄 목사의 전도 집회, 한국CBMC가 주도한 부활절 연합예배는 우 국CBMC 회원들이 소속 교단의 총회장 목사를 만나 통일 찬송가 공
리나라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이 함께한 대규모 집회였다. 이러한 교단 회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예
제2부 |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다
연합 집회가 열릴 때마다 겪었던 가장 큰 애로 사항은 교단마다 각기 배에 통일 찬송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는 것과 한국 교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가 선교 100주년을 맞아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는 기념비적인 해로
당시 한국 기독교에는 3가지 찬송가가 있었다. 군소 교단, 하나님의 성 만들자는 논리로 교계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회, 순복음교회 계열은 <합동찬송가>를 사용했고, 통합, 기장, 감리교, 한국CBMC의 노력으로 1981년 한국찬송가공회가 공식 출범했다. 위
성결교, 구세군, 복음교회는 <NCC찬송가>를 썼다. 합동, 고신 등 보 원장으로는 강신명 목사, 부위원장으로는 정봉조 목사를 선임했다. 한
수적인 교단은 <새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곡이라도 찬송가 국CBMC에서는 음악을 전공한 서울CBMC 이성재 총무가 위원으로
책마다 곡의 번호가 다를 뿐 아니라 가사가 다른 경우도 있었다. 교단 합류했다. 한국CBMC 임원과 회원의 기도와 헌신으로 1983년 11월
연합 집회가 열리면 사회자가 찬송가 번호를 각기 공지하는 불편을 감 20일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통일찬송가>가 세상에 첫선
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을 보였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찬송가를 통합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 말로 절실한 예배에 참가한 성도들은 모두가 <통일찬송가>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
시대적 요구라고 느낀 CBMC 회원들은 한국CBMC 중앙회에 건의해 을 찬양했다. 2007년 <21세기찬송가>, 2012년 <새찬송가>가 각각 편
1976년 임원회에서 찬송가 통합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찬되면서 우리나라 기독교 성장에 한몫을 한 <통일찬송가>는 역사 속
우선 각 교단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한국CBMC 회원들이 소 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