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1 - 은혜의 70년, 여호와께 돌아가자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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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대 개막과
북한 선교 활동 전개
마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남북 관계가 해빙 모드로 접어들면서 한국 기독교계는 북한 선교에 대
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많은 북한 선교 단체가 1990년대부터 식량난
을 견디지 못하고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들을 중국과 동남아 현지에서
20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영욕의 시대였다. 20세기 초반은 나라를 잃 직접 돌보면서 복음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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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2000년대에 접어들어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면서 인도적 지원과 탈
슬픈 역사로 점철되었으며 후반은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 북민 선교에 주력해온 북한 선교 단체의 사역 방향도 수정이 불가피했
던 도약의 역사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오직 앞만 보고 달 다. 또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한국 교회 차원의 전
려온 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의 꽃을 피웠다. 세계에서 가 략도 변화가 요구되었다.
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는 1989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북한 당국도 2003년부터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던 식량난이 어느 정 제1부 | 국제CBMC 출범과 한국CBMC의 해외 사역
5,000달러가 넘는 성장을 이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 도 완화되면서 정치적 부담이 큰 인도적 지원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의 성장을 전 세계에 선보인 쾌거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선진국 법’을 익힐 수 있는 개발 사업 유치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즉, 약품 지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만심이 부른 대가는 참혹했다. 1997년 말 IMF 원보다는 병원 설립, 식량 지원보다는 빵 공장 유치를 요구했다. 이러
구제 금융을 신청하면서 국가 부도 사태를 가까스로 막았지만 이후 구 한 북한 당국의 변화에 맞춰 대북 지원과 선교 방향도 인프라 구축을
조조정은 온 국민을 고통 속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위기는 우리 국민 지원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
제2부 | 한국CBMC 70년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다
의 위대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우리 국민은 불과 3년 만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평양과학기술대학은 북한에 선교 거점을 마
에 IMF로부터 받은 차관을 모두 상환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뿐 아니 련하려는 한국 기독교 교단의 요구와 첨단 과학 기술 개발을 이끌 인
라 정보통신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2000년대 정보통신 강국 재 육성이 필요했던 북한 당국의 이해가 맞물려서 극적으로 성사되었
으로 부상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다.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성공은 대북 선교 사업 추진에 본보기로서 역
2000년대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은 남북 정상의 만남과 이 할을 수행했으며, 실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중심이 되어 벌인 조용기
어진 남북 교류의 활성화다.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심장전문병원 건설 프로젝트가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영향을 받은 사
국방위원장이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6·15 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산가족 상봉,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경제
협력, 사회·문화·보건·환경 분야 협력 및 교류 활성화와 아울러 이를
위한 대화를 지속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남북 평화 분위기 속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이 이루어져 우리 국민은 제한적으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