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은혜의 70년, 여호와께 돌아가자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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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산업화를 1960년대 이후 50여 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이
런 압축적 산업화는 세계 근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변화와 기독교 부흥
교회 부흥과 대형 집회의 등장
산업화가 전개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대규모 이동함으로써 도
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1955년에 25%에 불과하던 도시 인구가
1975년 50.9%를 차지했고, 그 이후에도 도시의 인구 집중이 지속되
어 1990년에는 무려 81.95%를 초과했다.
이 시기 도시 서민을 대상으로 전도 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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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와 기독교 부흥 의 교회가 하루가 다르게 부흥했다. 또한 경제 성장으로 국민 소득이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1961년 출범한 박정희 정부가 수출 주도의 경 5,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올라가면서 교회 재정에도 여유가 생겼다.
제 개발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70년 기독교 신도 숫자가 390만 명 정도였는데
이 집권하는 동안 추진한 선 성장 후 분배의 경제 개발 정책으로 1962 1980년에 810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10년 사이에 기독교 신도가 2배
년부터 1982년까지 20년 동안 연평균 국민총생산 성장률이 8.2%에 이상 늘어난 것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부흥이 제1부 | 국제CBMC 출범과 한국CBMC의 해외 사역
이르는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것이 었다. 수많은 개척 교회가 생겨났고, 기도원은 하나님의 음성을 갈구
다. 이같이 눈부신 경제 성장과 더불어 급속한 산업화는 우리나라 경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제 전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별 취업자 비중을 중심으로 살 한편 교파를 초월한 대형 집회가 개신교 전체 교세 확장에 많은 영향
펴볼 때 1963년에는 농림수산업의 비중이 63.1%를 차지하고 광공업 을 미쳤다. 1970년대 첫 대형 집회는 1973년 5월 미국의 저명한 부흥
은 불과 8.7%에 그쳐 전형적인 농업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 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 초청 부흥 성회였다. 이 대회는
제2부 | 한국CBMC 70년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다
다. 그런데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지속된 급속한 산업화에 힘입어 초교파적인 대집회로서 여기에 동참한 교파만 해도 17개 교단이 넘었
1차 산업의 취업 비중이 1970년에 50% 이하로 떨어졌고, 1979년에는 다. 본 대회가 열리기 전에 각지에서 예비 대회가 열렸는데, 지방 대회
35.8%를 점했다. 반면 2차 산업의 비중은 1970년 14.3%에서 1979년 에 연인원 120만 명이 참여했고, 결신자만도 1만 6,703명이나 되었
23.7%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50여 개국을 순방해 집회했으나 한국의 집
정부의 산업화 정책이 1960년대까지는 경공업 중심의 지원에 집중되 회는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역사적인 전도의 첫날이며 한
었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 국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면에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역설했다.
겨졌다. 그 결과 제조업 부문의 취업 구성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는 우리나라 기독교 부흥의 결
비중이 1963년 29.7%에서 1979년 54.8%로 빠른 성장세를 보여주는 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집회였다. 이 집회는 1984년 8
등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에도 높은 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다. 국내외에서
경제 성장과 더불어 산업구조의 재편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연인원 400만 명이 참가해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성도가 한
한국은 서구 선진국들이 통상 길게는 200~300년의 기간에 걸쳐 성 자리에 모인 대회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