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2 - 죽산조봉암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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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김찬
                   7명을 선정했고, 당시 가맹 세포가 80여개 였고 다음 해에는 120여개로

                   격증했다.

                   그래서 전기 경성노동연맹회를 표면으로 하는 조선노농총동맹발기준비

                   회는 그 후 서울청년회와 접근하여 조선노농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그 개최 준비 중 때마침 남선지방(경상남북, 전남북, 충남북)에서는 앞 두
                   파의 계획을 무시하고 대구에서 남선노농대회를 개최하고 그 기세로 전

                   선적 통일 단체 조직을 주장하여 각 파를 함께 인정하여 동년 4월경 또한

                   경성기독청년회관에서 전조선노농총동맹을 조직하고, 이와 같이 조선에

                   는 청년, 노동, 농민의 각 층 운동은 표면적으로 통일되어 소회를 실현할

                   기초 공작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다이쇼13년 8월 말경 전기 꼬르뷰로
                   내지부와 서울청년회 파의 협의회는 때마침 해외의 운동, 특히 국제당 계

                   통 단체와 협의 문제가 발로하여 내지부는 꼬르뷰로 대표를 협의회에 참

                   가를 주장함에 대해 서울파는 반대하여 소위 무원칙한 섹트적 싸움이 되

                   어 그 협의회는 어떠한 성과를 보이지 않고 결렬되었다.
                   이와 같이 러시아의 기치 하에서 조봉암은 점차 전술을 우려하여 각 파의

                   의식분자를 모아 협의회를 개최하고 자파의 세력 확장에 여러 말을 늘어

                   놓고 당의 계획을 제출하는 것은 전무하므로 앞으로 이러한 전략을 파악

                   하여 자기가 신뢰하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하고 군중
                   획득에 근심하던 중, 다이쇼14년 9월경 평양형무소에 입감 중이었던 동

                   지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3명이 만기출옥하여 조봉암은 그 기회를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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