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4 - 죽산조봉암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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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증명할 방증도 없이 요구함에 대회의 수확은 노
동자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제목을 투쟁 조건으로 할 것인가
또 어떻게 투쟁을 전개할 것인가 등 노동운동선상에 일절 필요한 방침을
정함으로써 종국 목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회가 종료하자마자 조봉암은 약 3개월간 체재 중국혁명운동의 진행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일단 상해에 되돌아간 당시 국민정부 최
고 정치 고문인 러시아인 보로딘으로부터 여비 600원(중국돈)을 받아 쇼
와2년 9월 상순 한구 출발 상해에 도착하여 법계 포석로 중국인 방에 빌
려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조선 내의 당과 연락은 완전히 끊어져 있
었기 때문에 대회 상황은 보고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註) 一. 조봉암은 상해에서 조선 내 중앙집행위원에 대한 종종 통신은 2,
3회가 있었는데 사실 다이쇼15년 10월경 양명이 지참한 것 외에는 모두
우송한 것과 같음.
二. 또 종래 자료에 의하면 해외부는 제2차 조선공산당의 명으로 다이쇼
15년도 예산 36만 여원을 처음 기타 운동 자금을 국제당에 요구하고 혹
은 조선 내에 융통하고 있던 조봉암은 이와 같은 사실은 속속들이 알지 못
하고 단순히 만주총국 조직비로 원동부에서 500원을 받은 사실만 공술하
고 자금 등에 대해서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이 점을 부인함.
三. 다이소15년 6월 10일 이왕 전하 국장 당일을 기한 불온문서는 해외부
김단야가 조선 내에 비밀리에 보낸 것으로 들어서 알고 있고 당시 조봉암
은 만주 진출 중이었기 때문에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고 공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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