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죽산조봉암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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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섭(梁利涉)] 양명산(梁明山)으로 알려진 인물로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다. 항일운동 시절에
는 김동호로 호칭되었다. 그가 HID 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할 때에는 양명산이라는 이름을 사용
했으며, 때로는 양장우(梁壯宇)로도 통했다고 한다. 그는 신의주 우체국의 집배원으로 근무하
던 중, 우편행낭 속에 든 거액의 중국 돈을 훔쳐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이후 상해에서 사업에 종
사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조봉암과 양이섭이 이웃에 살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31년 6월 양이섭은 ‘우편물 절도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4년간 옥살이를 했다. 1955년 여름 조봉암과 양이섭
은 다시 만났다. 1956년 봄, 그는 5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조봉암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했고, 이것이 ‘북한정권의 자금’이라는 혐의가 조봉암에게 씌워졌다.
조봉암과 양이섭의 상해에서의 인연은 이원규(2009: 268-272) 참조
“7년 전 거금 횡령범 양이섭 상해서 압래”
(「동아일보」, 1931년 4월 24일 7면)
【신의주】 지금으로부터 7년 전 9월 26일 신의주부 내 상반정우편소에서
신의주우편국으로 전하라는 적행낭을 찢고 현금 이만오천 원을 꺼내 가
지고 도망한 당시 상반정우편소 집배인 강계군 강계면 서부동 774번지
양이섭(25)은 그간 상해 방면에서 공산운동을 하다가 지난 4월 3일 상해
영사관 경찰서에 체포되어 22일 신의주 경찰서에 압송되어 방금 신의주
경찰서 복원 사법 주임의 손으로 엄중 취조를 받는 중이다.
이 사건은 당시 큰돈의 도난사건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었을 뿐 아니라
이 돈이 해외 ○○운동자의 손에 들어갔다 하여 경찰에서는 극력 수사하
였으나 지금껏 행방을 알지 못하다가 상해에서 우연히 공산주의자로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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