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1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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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했다. 노량진 시대에 들어와서는 부부가 집사 직분을 받아 교 3층 본당에 들어가면 우측과 좌측에 커다란 기둥이 있는 것을 발견
회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 후 거주지를 경기도 양평으로 옮겨 설계 할 수 있다. 원래는 오른쪽에 한 개만 있어 중심대칭이 이뤄지지 않았
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정근 장로는 그와 절친한 정진영 다. 그래서 다시 외형상으로만 똑같은 한 개를 만들어 세워 우측과 좌측
4 장로에게 김 집사가 본당 내장공사를 맡도록 강력하게 당부할 것을 이 대칭으로 매우 안정감이 느껴지는 좌석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64)
장
일
산 요청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직접 양평까지 찾아가 간곡히 부탁하
시 대 여 마침내 최종 수락을 받아내게 되었다. 그 무렵 최 장로는 어찌 할 김동구 집사는 우리 교회 출신으로 소신을 갖고 정성껏 맡은 일을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진행할 수 밖에 없었던 미국 이민이 결정된 상태 수행했다. 방송실 위치 문제로 목회자와 의견을 달리할 때도 끝까지
였다. 이 때문에 마지막 과업인 새 성전의 본당 내장공사에 참여할 수 자신의 의지를 지키며 고수해 나갔다.
없게 되자 더욱 간절하게 김동구 집사를 원했던 것이다. 공사를 마무리했을 때 본당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창문도
유리블록으로 대칭을 이루며, 스테인드글라스의 그 아름다운 색채로
김 집사는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본당 3층과 4층을 꼼꼼하게 실 한껏 빛을 발했다. 마침내 2001년 준공검사를 받고 ‘그리스도의교회
측한 뒤 자상하고 세세하게 설계했다. 이어 직접 실력 있는 목수 및 석공 일산교회’로 표시한 등기부등본이 나왔다.
예가와 함께 작업에 착수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본당 천장 중심축을 ‘십
자가’ 형상으로 중심을 잡고, 균형의 원칙 아래 내부장치 작업을 해나갔
다. 나아가 본당 출입문을 ‘천국문’ 개념으로 인식하고 정성을 다해 2개 6) 임시 예배처소
의 출입문을 제작하였다. 최고급 품질의 목재를 고른 뒤 부평에 있는 목
공예 장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거의 예술품 수준으로 제작했다. 기공예배를 드리고 2개월 후인 10월에 공사장 바로 옆에 비닐로 임
본당 강대상 후면에 위치한 세례탕은 김동구 집사가 심혈을 기울 시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임시 예배처소를 설치한 것
여 창안한 도면대로 춘천그리스도의교회 성도인 김상균 집사가 작업 이다. 하루라도 빨리 일산에 거주하는 지역주민을 교회로 인도하기
하였다. 돌 가공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자인 김상균 집사는 위해서다. 매 주일 오전 7시에 1부, 오전 9시에 2부 예배를
정성을 다해 돌을 자르고 붙여나갔다. 특히 경사진 곳, 마름 드린 후 담임목사는 바로 노량진으로 가서 11시에 3부 예배
모꼴 공간 등 규격이 맞지 않는 곳을 잘 아우르며 모자이크 를 인도하였다. 2개월여 동안 일산과 노량진에서 예배를 드
개념과 예술성을 겸비한 세례탕을 만드는 데 진력하였다. 린 후 12월 둘째 주에 마침내 일산으로 이주하여 예배를 드
김성남 목수는 김동구 집사의 협력회사인 인테리어 사장 리게 되었다.
으로 본당의 목조작업을 훌륭히 해냈다. 김동구 집사가 해 노량진시대를 마감하고 일산에 오니 노량진에 거주하
당부분에 대한 도면을 하나하나 그려내면 한 치의 오차도 는 성도들의 교회 참석이 문제로 떠올랐다. 교회당까지 35
없이 그대로 시행했다. 3층과 4층 난간의 그 어려운 데스리 킬로미터... 상당히 먼 거리였다. 이에 매주일 수송용 버스
접붙임 작업 등도 튼튼하고도 깔끔하게 완수했다. 애초에 를 운행하기로 하고 망설이는 성도들에게 일산신도시로 함
비신자였던 김성남 사장은 우리 교회 공사 일 때문에 김동 께 이주해 같이 신앙생활을 하자고 적극 권유하였다. 노량
구 집사와 친해지면서 김 집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
일산 성전의 신축부지 옆에 마련한 임시예배처소
일산 성전의 사용승인서 게 되었다고 한다. (1994. 10.) 64) 그 기둥은 속이 비어 있어 두들기면 소리가 난다!
240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