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전시가이드 202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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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30×12×50cm  동, 대리석  2018




            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극명하게 성찰한다. 빌딩 꼭대기에서 시소를 타고 있는 그와 코끼리, 코끼리
            하얀 배를 타고 유유히 현실을 벗어나 은밀하며 신령스런 어딘가로 떠나가는        는 그의 마음인 물고기를 코로 물고 있다. 여기에서 둘은 평행을 유지한다.
            순례자, 삼륜차에 온갖 잡동사니 살림살이를 싣고 싸구려 월세방을 전전하는        그가 없는 자리, 혹은 장소는 두 개의 오브제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나
            유학생, 배낭을 메고 낙하산을 타는 모험가, 봇짐 같은 물건들을 지게에 한 아     는 가방이며, 하나는 집이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했던 것들은 이삿짐 보따리
            름 짊어진 아버지, 찢겨지고 떨어져 나간 날개를 어깨에 나사로 고정한 퇴락       들인데, 차에 한가득 실고 다니던 잡동사니였다.
            한 천사, 몇 개의 보따리를 꾸린 채 길가의 어느 지점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 떠    김근배의 조각은 ‘그’가 되어 스스로 체험한 여정의 흔적, 상처, 기억, 그리고 깊
            돌이,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자기 자신과 삶의 꾸러미들을 상찬하듯 차려 놓       은 성찰nt는 아예 ‘골칫거리’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2)
            고 멍하니 우리를 응시하는 그 자신 등 작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삶의 현장과
            예술가적 이상-지향을 꿈꾸는 소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김근배의 작품에 등장하는 코끼리도 자신의 내적 갈등이 심화될 때는 오히려
            그와 동반하는 흰 코끼리는 서로를 판가름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는 그 자신     가볍움이 아니라 그러한 무거움으로 변할 수 있다. 8년여의 세월을 이민하고
            이다. 그리고 그의 편재로 드러나는 새로운 조각물들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돌아 온 그에게 이제는 유목 그 자체가 화두는 아닐 것이다. 그가 세월을 통해
            있다. 그것들은 그를 실어 나르는 도구들인데 작은 배, 낙엽, 자동차, 낙하산 등   깨달았듯이 세계는 그 자신과 무관하게 움직이며, 유목하게 만든다. 아주 먼
            이 그것이다. 지극히 시간의 여정을 품고 있는 이 도구들은 그와 만나 모종의      세월을 되돌아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의 유품이 있는 현장에서 선보이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의미를 확대하고 있다.                         게 될 그의 작품들의 의미는 그래서 그가 안고 가야할 작은 화두인지도 모른
            배는 그 혼자 타고 가는 배, 코끼리만 타고 가는 배가 있는데 이 배에는 노가     다. 그에게 작품은 세상과 만나는 통로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없다. 흐르는 물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다. 코끼리와 그가 함께 배에 오르는
            경우 둘은 서로를 마주보지 않는다. 둘은 결코 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배
            머리에 서 있는 것은(다가올 미래) 그 자신이며, 배가 지나간 자리(과거)는 코    1) 김근배의 인물 조각상의 두상은 그의 언급대로라면 스프링을 닮아서 이쪽저쪽으로 통
                                                            통 튀어 다니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시각적으
            끼리가 서 있다. 이 배에는 세 개의 노가 있으며, 물결에 반사된 모습에는 배
                                                            로 보여 지는 인물상의 두상은 투명인간의 붕대를 연상시킨다. 그 붕대를 풀면 얼굴은 투
            만 있다. 물에 비친 배는 아무도 있지 않다. 배는 배로서 홀로 흘러가고 있다.    명해지고 우리의 시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때로 수평을 가기도 하는데, <시소>라는 작품은 둘의 관계를      2) 한국경제신문. “한 장관의‘흰 코끼리“,  20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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