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전시가이드 2022년 08월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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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탑골공원 팔각정 전경




        탑골공원 팔각정과 소식단청                                  서 공원 건립을 주도했던 영국인 브라운 고문이 영어로 파고다를 빈번히 사용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대로 공원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蘇式丹靑)                                          공원 입구인 삼일문을 들어서면 우아한 모습의 팔각정(八角亭)이 보인다. 팔
                                                        각정은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국인 브라운 고문이 탑골공원을 조성
                                                        하면서 1902년(광무 6)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위하여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이곳을 황실 관현악단
                                                        이 황실 음악 연주소로 사용하며 일요일에만 공개 연주하였는데 많은 구경꾼
        탑골공원은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공        들이 모여들자 1913년 7월부터는 평일에도 공개 연주를 하였다고 한다. 국가
        원으로 1991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이었던 배희한(裵喜漢, 1907~97)이 1981
        孫秉熙, 1861~1922),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등 애국지사 33인의 조선독  년 구술한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부제; 조선 목수 배희한의 한평
        립선언서를 학생과 시민들이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독립운동의 발상          생)'에 의하면 이 건물은 광화문에 있는 '고종 어극 40년 칭경 기념비전'을 지
        지로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은 도편수 최백현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최백현은 경복궁 중건과 창
                                                        덕궁 수리에 참여했던 조선 말기의 궁궐 목수이었으며, 도편수 최백현의 계보
        이곳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있었고, 조        는 최원식, 배희한 순으로 이어졌다.
        선 초기에는 비교적 억불정책이 심하지 않았던 터라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다. 그러나       이런 내력을 지닌 팔각정은 겹처마의 팔각지붕 건물로서 지붕 꼭대기에 2단
        성종 때부터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면서 연산군 때에는 원각사를 폐사         의 절병통을 설치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꽂아 마무리했다. 건물 내부는
        하고 이곳에 궁중의 가무(歌舞)를 담당하던 장악원(掌樂院)이 들어서기도 하       안쪽의 고주와 바깥쪽의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며 팔각 기둥을 세웠으며, 평
        였다. 중종 때 사찰의 건물마저 모두 없어지고 탑만 홀로 남게 된 후로는 이곳     주 상부에는 몰익공(勿翼工)에 운공(雲工)이 부가되었다. 기단은 각 면을 둘
        을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골'이나 '탑사동(塔寺洞)'이라고 부   러가며 장대석으로 다섯 단의 층단식 석축으로 쌓았고 내부 바닥에는 박석
        르게 되었다. 이후 약 400여년간 폐사지였던 이곳을 1897년(광무 1) 고종 당  을 깔았다. 조선 말기의 건축으로서 외관상의 비례가 뛰어났기 때문에 우리
        시에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있던 영국인 고문 브라운(Brown, J. M.)의 건의로   가 팔각정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남산 팔각정을 지을 때도 이곳을 모본(模本)
        공원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파고다공원으로 부르게 된 것일까? 파고다(pagoda)라는     단청은 모루단청을 하였으며, 외진주열에는 각 면에 낙양을 붙이고 무궁화 당
        말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파고다는 영어      초로 장식하였다. 외진주와 내진주에 걸쳐진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소나무,
        로 불탑이나 사원을 뜻하는데 산스크리트어의 '신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파      감나무, 단풍나무, 포도나무, 난초, 국화, 연꽃, 모란, 영지 등의 나무와 꽃들을
        가바티(bhagavati)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파가바티가 포르투갈어로 차    그려 넣어 일반적인 단청과는 달리 회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특성을 보여 준다.
        용되면서 파고드(pagode)로 변했고, 다시 영어로 차용되면서 파고다로 변하     마치 여러 폭의 문인화나 화훼도를 보는 듯한 그림들이다. 이런 경향은 청나
        게 된 것이다. 문화의 전파 과정에서 글이나 말도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되       라 말기 서태후에 의해 재건된 이이화원(頤和園)의 장랑에 대대적으로 쓰인
        었다가 다시 서양에서 동양으로 회귀하면서 변하게 된 예라고 생각된다. 따라       소식채화(蘇式彩畵)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이러한 예는 대한제국의 선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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