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전시가이드2025년 09월 이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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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사람이 좀 고답해, 2025, 종이에 샤프, 91.0 × 91.0cm       아종(亞種), 2025, 종이에 샤프, 34.8 x 27.3cm







            간의 시각적 기록이다. 흑백의 제한은 색채의 부재가 아니라 시각적 평등을        가 먼저 설정되고, 이후 개체들이 세분화되어 다양한 장르로 확장/전개될 예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다. 색의 감정적 효과를 배제한 자리에는 흑연이 만들        정이다. 작가는 “이 캐릭터들을 도자(ceramic art) 같은 입체 매체로 꺼내올
            어낸 농담, 마티에르, 레이어링이 뒤섞여 그림을 직조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예정”이라며 “평면에 갇힌 생명체를 현실 공간으로 소환하는 조형실험이 다
            작가가 샤프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일반 연필의 불규칙한 흔적을 배제        음 스텝”이라고 설명했다. 이 생태계는 동양의 산해경(山海經)적 상상력과 서
            하고, 균일한 농도와 결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휴지로 만든 찰필(擦筆)로 흑연     양 게르만 신화의 불확실성을 자연스럽게 교차시킨다. 그 위에 작가가 유년기
            을 문지르거나 휴지로 감싼 연필로 명암을 조절하는 등, 작가의 기법은 단순       부터 매혹된 RPG 게임 미학이 겹쳐지며, 관람자는 장면을 ‘플레이’하듯 해석
            한 선 긋기를 넘어 전체 작품의 에너지를 구성하는 유기적 연결고리다. “그림      하고 다음 레벨로 이동하게 된다.
            은 창조가 아니라 발견”이라는 선언처럼, 작가의 화면은 의식적 계산이 아닌
            무의식과 직관의 산물이다. 애니메이션의 프레임 분해 방식처럼, 작가는 주변       김남헌은 청년 작가이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이미 완성된 우주처럼 밀도 있
            의 기이한 포즈를 관찰해 ‘프레임 바이 프레임(Frame by Frame)’으로 해체  게 빛난다. 그러나 이 우주는 정적이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호흡하며 팽창
            한다. 움직임과 정지, 감정과 습관이 조각나 재조립되며, 그 결과물은 현실을      하고, 변주하며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게임의 레벨업에 비
            닮았지만 분명히 다른 존재들이다. 이 모든 과정은 정체성 탐구의 실험이다.       유한다. “지금은 1레벨일 뿐이에요. 최종판이 먼저 나와 있고, 앞을 향해 레벨
                                                            을 되짚어가며 플레이하고 있어요.” 이 말은 단순한 작업 계획이 아니라, 세계
            아종의 세계, 게임의 회화                                  관을 구축하고 매체를 초월하는 예술가의 선언과 같다. 샤프 드로잉에서 탄생
                                                            한 아종들이 도자-애니메이션-미디어아트-설치로 진화하면, 평면에 갇힌 형
            작가의 작품 속에는 이름 없는 생명체들이 넘실댄다. 도깨비와 괴수, 혼종과       상들은 이내 현실의 공간으로 발을 내딛을 준비를 할 것이다. 작가의 드로잉은
            감정의 형상들-이들은 기이함의 상징물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를 설계하는 청사진이자, 감정과 관계
            들어진 변형된 ‘나의 일부’다. 작가는 이 존재들을 ‘아종(亞種, Subspecies)’이  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새로운 조형 언어다. 한 땀 한 땀 쌓인 흑연의 층위는
            라 부른다. 작가의 말을 살펴보자. “아종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돼요. 누군가를      인간 내면의 지도를 기록하고, 중첩된 선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무수한 ‘아종’
            처음 만났을 때와 대화를 나눈 뒤 달라지는 인식의 변화, 그게 시각적으로 나      들의 발자국이 된다. 그러하기에 김남헌의 작품은 살아 숨 쉬는 생태계로 기
            타난 존재들이죠.” 이것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자아가 사회적 관계 속에      능한다. 드로잉으로 태어나 감정을 호흡하며, 상상의 돌연변이를 거쳐 끊임없
            서 어떻게 감응되고 변형되는지를 보여주는 조형적 심리학이다. 선입견과 오        이 진화한다는 뜻이다. 샤프라는 예리한 도구로 세계의 단면을 긁어내면, ‘나
            해, 기대와 실망, 우정과 거리감, 이 감정들이 생명체로 환생해 작가의 화면에     의 아종’과 ‘당신의 상상’이 만나 대화를 시작한다. 이 도감은 영원히 미완성이
            머무는 것이다. 작가의 회화 세계는 RPG처럼 설계된 ‘게임의 월드 뷰(World   다. 매체를 가로지르고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끝없는 질문과 새로운 생
            view of the game)’와도 같다.                        명체를 펼쳐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8월 30일부터 9월 27일까지 파주에 있는 갤러리 끼에서 만나
            김남헌 세계관이 작품으로 옮겨지는 순서는 ‘샤프드로잉’이라는 가장 큰 구조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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