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7 - 전시가이드 2020년 9월호 이북
P. 67

구선동설화Ⅲ  265×210×275  분청토 화장토 재유                    게딱지  410x330x135  분청토 화장토 흑유











            그들의 조형이 웅장하고 정교하다면 한국 도자기는 端雅(단아)하다. 다채롭고       며 끊임없는 현실세계와의 탐색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십수 차례의 국내외
            웅장한 것이 우리의 눈을 끌고 소리치며 주인이 되겠다고 고집한다면 간결하        그룹전과 공모전에 출품하고 후진에게 스스로의 체험을 나누는 일에도 관심
            고 단아한 것은 우리의 몸에 봉사하는 일부가 되어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려        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자기 통제와 균형 안에서 벗어나는 일
            한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요하거나 아니면 앞에서 어른거려 도대체       없이 수련의 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삶은 월문리 작업장 안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이가 있다면, 옆에서 항상 제 자리를 지키면서 힘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업이었다.
            을 주는 이도 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고 그릇의 됨됨이를 사람의 됨됨이
            에 비유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월문리가마와 함께 이십오 년 간을 切除(절제)와 健康(건강)을 향한 修身(수
                                                            신)의 道(도)와 工藝(공예)의 美(미)를 찾기 위한 훈련의 기간으로 삼았던 김兄
            김용윤兄(형)은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이다. 兄(형)의 삶도 그렇고     (형)의 작품전에서 무엇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겸손한 工藝家(공예가)로서
            兄(형)의 그릇도 그렇다. 삶이 劇的(극적)인 연출을 하지 않는 만큼 그릇도 무    의 자세였다. 더구나 그의 작품에서 재료에 익숙하려는 技術性(기술성), 기능
            대 위의 도구 역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말은 자칫 잘못하면 김兄(형)    에 진실하려는 專門性(전문성), 사회에 봉사하려는 道德性(도덕성)을 읽을 수
            이 정체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될        있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도자공예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부터 벗어나 새롭게
            염려가 있다. 더구나 劇的(극적)인 탐색에 익숙해져 있는 눈으로 볼 때 오해의     지향하여야 할 한 방법론을 읽는다는 의미로 여겨져서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폭은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兄(형)이 그간에 쌓아온 수련과정을      아니었다. 그의 作品(작품)은 든든한 量感(양감)을 조형의 기반으로 하고 있
            보면 우리 곁에 듬직한 陶藝家(도예가)가 있다는 여유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다. 가볍게 옮길 수 있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항아리들은 든든한 양감으로
                                                            인정되고 더구나 무게의 중심이 低部(저부)에 내려앉아 마치 대지에 굳게 버
            70년대 이전에 陶磁分野(도자분야)에 入門(입문)한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예       티고 서있는 바위와 같다. 그러나 구연부의 맺음은 기능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가로서의 수련과정은 철저히 자기 안에서의 발견과 모색의 과정에서 시작          두텁게 굴리거나 접어 붙이고 있지만 가시적인 윤곽은 무거워 보이는 양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陶磁分野(도자분야)의 경향은 사회일반의 民族主義       가볍게 들어 올려주어 전체적인 무게감을 오히려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史爟(민족주의사관)에서 비롯된 傳統文化(전통문화)의 現代化(현대화) - 즉,
            韓國化(한국화) - 라는 큰 목표를 안고 있었지만 사회의 제반 현실에서 구체      가능한 생략과 자제는 고요하고 건강한 도자를 위해 최소한 표현을 하려는 배
            적인 방법도 목적도 설정할 수 없었던 陶磁觀不在(도자관부재)의 시대였다.        려이며 사용자에게 사유의 여지를 남기려는 제작자의 도덕심에서 비롯된 것
                                                            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의 면면은 철저한 프로정신에서 시작된
            김兄(형)이 陶藝家(도예가)의 길로 나선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였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77년은 이미 粘土(점토)와 인연 맺은지 10년이 되
            는 해였다. 곧이어 전통도자생산장에서 製作(제작)의 與件(여건)을 체험하고       김용윤兄(형)에게 앞으로 주어진 소명은 兄(형)이 이제까지 이루어 온 삶과
            경기도 덕소를 지나 월문리 나지막한 구릉발치에 봉우리가마를 박고 본격적         그릇에 오랜 경륜과 인품을 담는 일이며 그 결과는 우리 사회에 헌신적으로
            인 수련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을 벗어난 수련생활이 자기만의 삶을 위한 은       공헌하는 陶磁工藝(도자공예)로서 한 발짝 크게 내디디게 하는 힘이 되어 주
            둔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세계의 큰 담을 허물       는 것이다.


                                                                                                       65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