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문득(聞得)_마음을 그릴 때 꼭 들어야 할 작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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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아 미







           피천득의 인연, 천상병의 귀천은 책가방에 종종 넣고 다니며 동경해 온 대상들로, ‘나도 인간사에 쿨해질 거야’ 라며 호기롭던 어린 시절 비
           장의 무기였다. 아사코를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임에 탄복했다. 수려한 작품을 읽던 쾌감은 지
           나가고, 40대 지금은 이 글들이 생의 바닥이라 칭해질 힘겨운 일상들, 행복 갈증, 사무치는 그리움 같은 마음의 중량을 겪어낸 심정 모음임
           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평범한 나의 일상에도 ‘인연’이 있고 ‘귀천’이 있으니 장황한 서두로 글을 열었다. 인연과 귀천의 평범한 대상은 부모, 남편, 자녀, 친구, 직장,
           직업, 동료, 자산 등 일게다. 그리고 이 모두는 ‘집착’ 대상이기도 하다. 내 경우 10대엔 ‘왜 성적에 집착해?’, 2030대엔 ‘일에 너무 집착하는
           데?’, 40대 퇴사 후 ‘딸집착하네’라 들었다. 그때그때 소중한 대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인데, 어리둥절했다. ‘집착’은 동기유발 또는 팽팽한
           긴장감을 생성하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듯도 한데 말이다. 그리고 그런 집착 마무리 후, 내려두기 기쁨도 만끽할 수 있겠고.


           피천득이 아사코를 떠올리던 세 번의 기록들을, 엉뚱하게도 딸과의 관계에 투영하곤 한다. 물론 그 시간대가 피천득이 서술한 청장년 노년
           중 어느 며칠간은 아니다. 딸 유년기, 아동기, 청소년기를 수평으로 놓아 30대 직장맘, 휴직맘, 40대 후반 수험생맘 시절과 나란히 선으로
           잇고, 세 번으로 나눠 공식화하듯 대입해 본다. 커리어가 너무 (힘들었지만) 만족스러웠다 보니 당시 집착 대상은 인맥, 프로젝트, 성과였
           고, 휴직 후 아이로 대상이 옮겨지고 ‘캐나다’라는 새 환경 덕분에 건강한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경쟁, 줄 세우기, 눈치보기 없는, 여자/
           어린이라 대우받는, 친척가족 없지만 같이 어려움을 헤쳐 나간 시간들은, 피천득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아사코를 아득히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게 다가온다. 어린 딸과 종종 달콤한 도넛가게로 달려간 하굣길과 매서운 추위 속에 포근했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 웃음, 성장통
           등과 매칭된 추억들이 줄줄이 소환된다.


           꿈속 지난 듯_마치 곱던 아사코 추억에서 깨어나 현실을 맞딱드린 듯_ 대학입시를 향해 고군분투를 하는 딸과 함께인 요즘은 딸이 주인공
           이고, 옆에 바짝 붙은 난 러닝메이트 같다. 쓴맛 나는 날들이 이어지면, 도넛가게서 깔깔 웃던 때를 떠올리며 잘 지나갈 거야 다독인다.  ‘인
           연’ 작품에서는 아사코를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거라는 구절을 사랑하지만 나의 현실 시간대에서는 딸의 수험생활인 세 번째 터
           널이 스릴 넘치고 지켜볼 수 있어서 좋다라고 남긴다. 자주 떠오르는 행복했던 장면을 다른 의미로 ‘집착’해보고자 액자에 박제해 보기로
           했다. 세상 경험들을 누군 시 쓰고 누군 노래로 부른다면, 나는 채색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인연과 귀천에서 느낀 심정들이 어느새 내 것
           으로 스며들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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