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삼척김씨 구호종중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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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김씨대종회
삼척김씨대종회
묘를 하지 못하므로 그 통한(痛恨)이 어떠하겠는가?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비록 경서(經書)에 보이지 않으나 실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부합되니 예문(禮文)에
없는 예라고 하겠다. 세상이 날로 낮아져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여 비록 근년에 쓴 묘라도
잊게 마련인데 하물며 먼 세대이겠는가? 그래서 묘소가 허물어져 제사를 잇지 못하는 자를
이따금 보게 된다. 이제 김씨 문중에 멀리 추모하는 정성이 이와 같은 것을 보건대 쇠퇴해
가는 이 세상의 모범이 될 만 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아픈 몸으로 그 청을 받아들여 책임
을 때운다.
무자년(一九四八)초봄하완(下浣)에
통정대부(通政大夫)전비서원승(前秘書院丞) 김영한(金甯漢)은 삼가 짓고 강릉 최중
희(江陵崔中熙謹書)는 삼가 쓰노라
다) 效力副尉 諱謹 墓碑記
本 墓는 三陟金氏이신 悉直郡王 諱渭翁의 十六世孫 效力副尉 諱謹의 墓로서 祖考는 諱終淳
迪順副尉요 祖妣 安人 江陵崔氏요 考의 諱는 世賢 務功郞이며 妣에 安人 燕岐魏氏로 公은
中宗 己亥年 三月 三日 生하니 天性이 至純至孝하고 聰明이 過人이라 配密陽朴氏로 有三男
하니 長에 振威將軍 周殷이요 次에 號石橋 嘉善大夫漢城判尹 商殷이요 季에 號逸齋 嘉善大
夫折衝將軍 夏殷인바 周殷 有二男하니 澈 泂요 商殷 有二男하니 永慕 永思요 夏殷 亦二男하
니 聲倬 聲儁인바 以後 派分으로 可謂 百子千孫에 達하나 散在各處하여 難記細密이라 文獻
과 鄕誌에 憑하면 公은 生得寬厚篤行之士로 官至效力副尉라 壬亂爾來 昏濁한 隺路에서 不義
의 榮達을 浮雲視하고 鄕里로 自退하여 後進을 委한 敎化薰陶에만 盡瘁타가 宣祖 己丑年 正
月 五日 卒하니 亨年 五十一歲라 葬北坪 龜湖 料科山 祖考墓 左便 酉坐 雙封하다 公의 文名
은 足히 一鄕에 風靡하였고 德行은 널리 四隣에 及하여 勤勉治産 實로 龜鑑之士였으나 歲久
年深한 今日에 이르기까지 此를 記述한 一片表石 조차 無함을 恨타가 玆에 晩時之嘆이 不無
하나 全後孫들 報本의 丹誠을 모아 公의 遺蹟을 永世에 銘刻하려는 快擧에 際하여 不肖 亦
是 後孫의 心情에서 아래 荒蕪 一句를 詠하여 敢히 撰하려함 水流千谷其源同이요 生蕪百
世其名長이라
西紀一千九百七十八年 戊午年 十月 十六日
大韓民國 第七代 國會議員 宇榮 謹撰
大韓辯護士協會長 法學博士 梁俊模 謹書
門長 墡鎬 炯玉
會長 參奉 麟鎬 泰榮
總務 炯大
幹事 熙鎬 源斗 炯三 洙榮
♦ 효력부위 휘근 묘비기
본 묘는 삼척김씨이신 실직군왕 휘위옹의 십육세손 효력부위 휘근의 묘로서 조고는 휘종순
적순부위요 조비 안인 강릉최씨요 고의 휘는 세현 무공랑이며 비에 안인 연기위씨로 공은
중종 기해년 삼월 삼일 생하니 천성이 지순지효하고 총명이 과인이라 배밀양박씨로 유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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