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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옳은 결말이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어보인다.





              <69세>는 성폭행 전과 후를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효정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결

        백한’ 삶을 살았는지, <69세>는 굳이 해명하려들지 않는다. 효정이 모두로부터 좋은 평판
        을 얻은 사람이니 당신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밑밥을 임선애 감

        독은 깔지 않는다. <69세>는 성폭행 공론화 이전과 이후를 말한다. 효정은 사실 처음부터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이 피해자인 효정을 치매
        로 의심하기 시작하자, 문제를 덮고 잊기로 노력하는 대신 온 세상에 더 분명히 알리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옥상 장면은 그래서 오래 기
        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만으로 큰 용기를 내야 했던 일이, 마지막에는

        익명의 다수에게 전단지로 호소한다는 더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로 바뀌어 있다. <69세>
        는 그 사이의 시간을 그린다.
              수북이 쌓인 전단지가 바람에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SNS에서 ‘공유’ 또는 ‘리트

        윗’이 되는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예술계_내_성폭력 이나 #미투 운동이 지
        금처럼 파급력을 갖게 된 이유는 법이나 제도가 머뭇거리는 동안 일반 시민들이 사건을
        공유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고발한 다음 일반

        시민에게 다시 호소해야 하는 상황, 이것이 <69세>가 말하는 성폭력 사건의 어려움이다.
        더 정확히는 ‘성폭행 피해자 되기의 어려움’이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산다’는 말의 뜻은, 여성인 이상 어떤 조건으로도 위험

        을 없애기 어렵다는 데 있다. 모르는 사람을 조심하면 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여성은 많
        은 경우 가족으로부터 학대당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머더>는 한 남성이

        임신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사건을 다루는데,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자막으로 나온다.
        “매일 3명의 여성이 미국에서 현재 혹은 전 파트너에게 살해된다.” “자식과 파트너를 살
        해하는 부모는 대개 남성이다.” 뒷배경이 충분하면 안전하리라는 예상도 틀렸다. 할리우

        드에서 여성 영화인들의 미투 폭로가 이어졌던 때, 영화인 집안 출신으로 스티븐 스필버
        그가 대부인 기네스 팰트로조차 영화계 내 성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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