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수정230816 이성필성지순례내지192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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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강원도
61 한서 남궁억기념관
홍천군 서면 한서로 667
“홍천 한서 남궁억기념관, 독립을 향한 구국일념이 가득한 무궁화 성지”
한서 남궁억 기념관
모곡예배당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가면 일제 강점시 누 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
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으로 나라사랑을 실천 실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한 남궁억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과 예배당 일선에 나서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 함양과
및 묘소가 있다. 남궁억 선생은 대표적인 개 여권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
화파의 한사람으로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 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 했고 모곡리로 내
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민영환이 세운 흥 려와 예배당을 짓고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화학교에서 개화사상과 애국정신을 가르쳤 남궁억 교장은 학교 뒤뜰에 무궁화 밭을 일
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 구어 7만 그루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
하였으나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궁억의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신문 외로운 민족운동은 1933년 무궁화 십자가당
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사건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취임한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모진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아 병이 든 남궁
한반도 분할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 억은 그 여독 (餘毒) 으로 1939년 77세를 일기
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때 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에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무궁화정신은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남아 우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리의 민족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남궁억은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