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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의 오산지역은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어 있었다. 오늘날 경기 이북의 양주
와 이남의 광주가 그 행정 체제 명칭의 흔적이기도 하다. 오산지역은 양광도 체제에서 수원도호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오산은 조선왕조가 개국하면서 지역적인 요지로 새롭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왕조 초기의 오산지역은 경기도였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왕실과 관료들의 생활 공간이며 재원
의 근간이었으므로 그 관리가 더욱 중요하였다. 무엇보다 그 핵심은 왕조 개국자들의 경제적 토대였
던 토지의 분급이었다. 왕조 국가에서는 경기 좌우도의 토지로 건국 초기 지배층의 물적 토대를 구축
하였다. 건국 동지인 공신들에게는 경기도의 토지로 공신전(功臣田)을 주었다. 또한 왕실과 정부에
관련된 능침(陵寢)·창고·군자전(軍資田)·공해전(公廨田)·사원전(寺院田)·학교·신사(神祠)·
향(鄕)·진(津)·역리(驛吏)·지장(紙匠) 등의 전지(田地)를 지정하였다. 신왕조의 근간이었던 사대부
(士大夫)들도 한양 도성 인근에 거주하게 되면서 왕실을 호위하며 관직 생활의 대가로 경기도의 과전
5)
(科田)을 분급 받았다. 따라서 경기도의 행정적인 개편은 지배층 구도의 방향타라고도 할 수 있었으
며, 오산지역이 부각되는 요인이었다.
조선 왕조 초기의 경기도는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신왕조의 집권 세력이 고려의 왕도
였던 개경을 대신하여 한양을 정치 중심지로 선택하면서 경기도의 운영 체제가 변화되었다. 오산지
역은 그 과정에서 지방 행정 체제가 변화된다. 조선 초기의 오산지역은 경기도 개편에 따라 두 차례
에 걸쳐 행정적인 지방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4년(태조 3) 각 지
방의 명칭을 변경하고 조정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오산이 역사적 지역 공간으로 재구성되는 계기
였다. 1394년(태조 3) 경기도를 좌우도(左右道)로 나누고, 양광도·강릉 교주도·서해도를 개칭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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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부터였다. 오산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우도에 소속되었으며 수원지역에 포함되었다. 두 번째는
1413년(태종 13) 전국 행정구역의 정비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고을의 읍호가 변경되었다. 각도의 단
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縣監)으로 개칭하였으며, 군(郡)과 현
(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다. 예컨대 영주(寧州)를 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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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사례이다. 다만 당시의 읍호 변경은
지방관과 고을의 위계 체계화 및 서열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고을의 승격이나 강등, 혹은 지방관 신설
을 통한 지방 행정 단위의 전면적인 변화를 추구한 행정 개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양광도에서 감무가
설치된 지역은 82개 고을에서 13개로서 15.9%에 달하는 비중으로 행정제도를 크게 좌우하는 개편은
아니었다. 8)
경기도의 개편은 이씨 왕족의 궁실 건설, 행정수도의 이전, 왕실 숙위 체제와 수도권 방어 체제의
오산시사 재편 등과 맞물려서 동시에 추진된 일이었다. 경기도의 수령들은 한양의 궁성을 건설하기 위해 지역
민을 인솔해 도성에 파견된 상황이었으므로 지역 행정체제 개편에 적극 참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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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5) 『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4월 4일(정묘).
6)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6월 23일(신묘).
7) 『태종실록』 권26, 태종 13년 10월 15일(신유).
110 8) 정요근, 「12~15세기 지방 제도 개편의 전개와 그 역사적 의미」, 『한국중세사연구』 57, 2019, 164~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