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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에서도 견고함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성벽 또한 석축과 전축을 병용하여 건축함으로써 목재와 벽
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법은 동서양 축성술의 결정체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 성역은 본래 10년 동안 공사를 진행하여 계획하는 것으로 구상되었다. 하지만 정조를 비롯한
신료 및 백성들의 노력이 모여 3년여 만에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짧은 기간에 완공될 수 있
었던 공역의 원동력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금노동자의 고용은 성곽축조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었다. 성곽 공사에 있어 가장 높은
효율성은 임금노동자의 고용이었다. 작업 일수를 기준으로 하는 노임제의 실시는 정조의 첫째 아들
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사당인 문희묘(文禧廟)를 짓는 공사에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만 해도 국가차원의 공사에는 장인을 강제로 동원하는 부역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장인의 부역
노동이 사라지고 하루 일당을 기준으로 한 노임제가 마련되자 장인들은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고 유
능한 기술자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노임제의 실시는 장인의 기술 성장을 가져왔고, 이러한 변
화는 화성 건설의 공사 기간 단축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노임제의 정착은 화성 건설 공사에 장비를 이용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성곽 사업의 경우 수많은 돌
을 뜨고 운반하는 작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석재 운반을 용이하게 하면서 동시에 노임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종 장비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조건에 의해 화성 축
성 과정에는 다양한 장비들이 이용되었다. 비록 재래식 장비들이었지만, 대량으로 제작되어 공사에
투입됨으로써 공사 기간 단축에 큰 힘이 되었다.
실제로 거중기는 1대만 제작되어 공역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거중기의
경우 새로운 기계의 제작이 어려웠던 것만큼, 사용 과정에서도 잦은 고장으로 인해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축성에 동원된 장비는 유형거(遊衡車) 11량, 대거(大車) 8량, 별평거(別平車) 17
량, 평거(平車) 76량, 동거(童車) 192량, 발거(發車) 2량, 녹로(轆轤) 2좌, 썰매(雪馬) 9좌, 구판(駒板)
8좌가 준비되었다. 이중에서 공사가 끝났을 때 평거는 14량, 동거는 27량 남았다는 것으로 보아 활용
가치가 매우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임금노동자의 고용은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노임을 줄이기 위해 다
양한 장비를 활용하려고 했던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공생관계가 화성 축성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중요
한 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둘째, 건축 자재의 원활한 조달과 건축 부재의 표준화로 공사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성곽 공
사는 다양하고 방대한 양의 건축 자재가 필요하다. 성벽에 필요한 돌, 성문과 건축물의 재목으로 이
오산시사 용될 나무, 각종 구조물에 쓰일 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건축 자재와 부재는 전국 각지에
서 수원으로 모여들었다.
석재는 현재 팔달산의 동쪽에 위치하는 숙지산(熟知山)에서 옮겨왔다. 관청에서는 공사에 맞게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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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 규격을 정하고, 그 규격에 따라 값을 매겨 놓았다. 그리고 일꾼들이 돌을 떠오면 미리 정해 놓은
권
가격에 따라 값을 지불하였다. 그 결과 석재의 규격이 통일될 수 있었고,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은 이미 맞춰 놓은 규격에 따라 공사를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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