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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농업진흥책의 일환으로 수리 시설을 확보하고 시범농업단지를 조성하였다. 농업진흥책은 정
                  조의 화성 신도시 조성 과정에서 꾸준하게 논의되었던 정책 중 하나이다. 수원에서 진행된 농업 정책

                  의 핵심은 물을 저장하거나 물길을 다루는 기반 시설과 둔전(屯田)을 경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화성 건설 시작과 함께 준비되어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가장 먼저 수원 북쪽

                  의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수원천과 기타의 지천을 관리하는 치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와 함께 농
                  업용수를 마련하는 대책도 마련되었다. 화성 성벽 구간 중 북수문[화홍문]을 지나는 수원천에는 하천

                  바닥을 깊게 파는 준설 작업과 하천의 둑방에 나무를 심는 식목사업을 병행하여 장마철의 상습적 범
                  람에 대비하였다. 또한 수원천에서 뻗어가는 도랑을 이용하여 만석거(萬石渠)를 조성하고, 수문(水

                  門)과 수갑(手匣)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수리기구의 설치는 만석거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는 동시
                  에 수원천과 연결하여 물의 양을 조절함에 따라 여름철 범람에 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수원천의 수량이 상류와 하류에 차이가 난다는 점에 착안하여 상류의 북수문 수문은 7개, 하
                  류의 남수문 수문은 9개로 설계하여 시공하였다. 북수문 밖에 준설된 용연(龍淵) 역시 버드나무가 드

                  리운 아름다운 연못이라는 점 외에 광교산 물줄기를 이용하여 물의 흐름을 관리하는 역할도 할 수 있
                  도록 하였다.

                    정조가 구상하는 신도시는 자체적으로 도시의 재정도를 높여 백성의 생활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야 했다. 이를 위한 정책이 바로 둔전 경영이었다. 화성 성역이 한창인 정조 19년(1795)에 건설된 만

                  석거를 시작으로 수원에는 저수지와 제언(堤堰) 공사가 계속되었다. 완공된 만석거의 물은 장안문 밖
                  너른 땅을 개간한 대유둔(大有屯)의 설치로 결실을 맺었다. 당시 만석거의 제언은 현재 수원 장안구

                  만석공원 일대로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정조 22년(1798)에는 현륭원 인근의 만년제(萬年堤)가 개축되었고, 정조 23년(1799)

                  에는 서호로 알려진 축만제(祝萬堤)와 축만제둔[현재 서둔동 일대]이 축조되었다. 수리시설의 확보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으로 수원의 도시 재정도를 높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수원에서의 이러한 성공적인 경험으로 인해 정조는 정조 22년(1798) 11월 수리(水利)를 특별히 강

                  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권농정구농서윤음(勸農政求農書綸音)>을 전국에 내린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 경영을 토대로 제언 설치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수원의 발전방향을 전국

                  의 모범으로 부각시켜 확장해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셋째.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격상된 것은 수원이 서

      오산시사        울 남쪽의 거점 도시[重鎭]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수원이 삼남으로 가는 교통요지가
                  되면서 인구가 집중되고, 그 결과 활발한 상업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신읍으로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기 위한 정책은 초대 화성유수인 채제공의 발의에서 출발하였다.
      제

      2           신읍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정조 14년(1790) 2월. 그는 수원으로 부자 상인들이 모일 수 있는
      권
                  방안을 제시하였다. 신읍의 거리에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면 서울의 부자 상인들에게 무이자로 돈
                  을 빌려주어 신읍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수원과 인근 지역에 오일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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