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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19세기 오산 사람들의 농업과 산업
1. 초평면 농민의 토지소유와 경작실태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이행은 조선시대를 지탱해 온 사상·사회체제·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완과 해체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질서와 사상의 모색을 통해 근대사회로 전환되어가는 시대였다.
수원부 역시 정조대에 추진된 신도시 건설과 성곽 축조 등의 변화를 토대로 향촌 사회의 발전을 위한
지역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같은 시기 수원부 출신의 실학자인 우하영(禹夏永, 1741~1821)은 수원 지방 유일의 향약(鄕約)인
「향약설」을 만들어 당시 사회신분제의 해이로 인한 황폐와 향촌사회의 붕괴 양상에 대해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향촌민 모두가 참여하는 농촌공동체의 협동조직인 향약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
였다. 그는 필생의 대작인 『천일록(千一錄)』은 조선 후기 수원을 중심으로 하는 근기 지역의 농업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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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수준과 농업 경영·농사 관행 등을 담은 전문적인 농업 관련 저술을 구성하여 편찬되었다. 전국
을 목표로 하되 수원지방의 농업 특성을 전제로 노동집약적 농업개혁론과 정농사상(精農思想)을 담
은 『농가총람(農家總覽)』과 전국의 지역별 농업 환경과 관행을 관찰하고 토지 비옥도, 전답 비율과 재
배 작물의 경종 방식, 제초와 시비, 수리 문제, 주곡 생산물 외의 농가 부업 등을 조사한 『건도부산천
풍토관액(建都附山川風土關扼)』은 조선후기 농업연구에 주요한 자료이다. 특히 『건도부산천풍토관
액』에서는 수원지방의 낙후된 농업 기술과 경영 형태, 척박한 토성, 이앙광작(移秧廣作)과 농사를 게
을리[懶農]하는 풍조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는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오산만의 구체적 현
황을 읽어낼 수는 없는 한계가 있다. 이에 여기서는 현재 오산시에 속해있던 초평면의 19세기 양안
64)
분석을 통해 당대 오산 농민들의 토지 소유와 경작실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초평면은 광무 3
년(1899) 2월 당시 궐리, 죽전, 궁대, 가장동, 청학동, 서촌, 가수동, 누읍리, 벌음리, 두곡, 탑동 등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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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궐리 에는 오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궐리사(闕里祠)가 세워
진 곳으로 공씨들의 집성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공씨 집안을 중심으로 오산 농민의 토지소유와
경작실태를 살펴보기에 좋은 예가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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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리는 양지아문(量地衙門) 양전 당시 초평면에 속해 있었다. 양지아문의 수원군양안 기재 내용
오산시사
63) 『오산시사』 1, 제2장 역사, 136쪽.
64) 이세영, 「근대 오산 농민들의 토지소유와 경작 실태」, 『교육·문화도시 오산의 역사문화 바로알기』, 한신대학교박물관, 2019. - 이하 초
평면 농민들의 토지소유와 경작실태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인용하였다.
제 65) 궐리는 고려 말에 孔子의 53세손인 孔紹가 건너 온 이후 공자의 후손들이 모여서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공자의 64
2 세손인 孔瑞麟이 궐리사의 전신인 서재를 세웠던 16세기 초의 궐리는 수원부 중규면 구정촌이었다. 정조 16년(1792)에 오산궐리사가 영
권 건되었는데 이 무렵에도 궐리는 공씨집성촌으로 존속되고 있었다.
66) 量地衙門은 1899년∼1901년 전국 331개 군 가운데 124개 군을 量田하였는데, 광무 4년(1900)에 수원군 39개 면을 양전하고 1901년 7월
에 양안을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된 중초책 73책(奎 17651-v.1-73)이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양지아문의 중초책 양
안 73책 가운데 제 46책이 초평면(상) 양안이고, 제 47책이 초평면(하) 양안이다. 73책의 각각의 표지에는 初査·再査·初書·再書·初
160 准·再准의 시기와 담당자[조사원]의 이름을 기재한 부표[付表, 조사안]가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