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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하여 장시를 활성화시키고, 이들에게는 세금은 걷지 않아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하자는 것 159
이었다. 역사
이러한 채제공의 의견을 시작으로 조정에서는 수원 상공업 활성화 정책에 대하여 석 달 동안 계속 / 유적
해서 논의하였다. 그해 5월 수원부사 조심태는 수원의 상공업 정책을 구체화시켜 제안하였다. 서울
사람 대신 수원 사람 중에 여유 있고 장사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장사를 · 유물
하도록 하자는 상업 활성화 정책, 용주사 스님들에게도 돈을 빌려주어 종이와 신발을 만들도록 하자
는 수공업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의견은 다시 대신들과 논의를 거쳐 그대로 결정되었고, 그에
필요한 비용은 균역청에서 6만 5,000냥을 빌려와 상공업 발판을 마련했다. 그 결과 장사 경험이 있
는 수원부민에게 1만 5,000냥이 대여되어 시전이 개설되었다. 이때 시전에는 입색전·어물전·목포
전·미곡전·유철전·관곽전·지혜전 등이 개설되었다. 61)
상공업 발전은 인구의 증가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원 부민들에게 조세를 감면해주고,
특별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 19년(1795)에는 수원 인근의 진위·용인·안산·과
천·시흥을 수원부로 이속시켜 수원의 인구 증가를 꾀하였다. 또한 화성 성역 기간 동안 수원에서 장
기간 일했던 노동자들은 일반 백성 인구가 급증하는 요인이 되었다. 62)
수원으로 이주하는 현상은 양반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 전라도 해남에 거주하던 남인인 윤선도
(尹善道, 1587~1671)의 후손들이 수원에 이주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채제공은
수원에 새집을 마련하고 채로헌(采露軒)이라는 당호를 내걸었다. 이러한 정책은 수원의 인구를 급
격히 증가시켰다. 수원 신읍 조성 당시인 정조 13년(1789) 구읍치에서 신읍치로 이주한 민가(民家)가
244호(戶)였는데, 정조 18년(1794) 수원 성내 인구는 1,347호(戶)에 약 5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급증
하였다.
이외에도 정조는 수원 사람들이 부유하게 살아갈 방안을 강구하였다. 정조 21년(1797)에는 모자(帽
子)와 가삼(家蔘)의 무역과 판매 독점권을 화성의 상인에게 주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채제공
을 비롯한 조정 대신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서울의 대상인을 유치하여 판매 독점권을 주어 수원
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상업 진흥 방안도 좌절되었다.
화성 완공과 함께 정조의 신도시 구상도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조 말년에 이르면
정민시(鄭民始, 1745~1800), 서유린(徐有隣, 1738〜1802)과 같은 정조 측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장용영 강화와 재정 확대 정책은 채제공을 비롯한 다수의 신료들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정책의 우수
성은 대체로 시행 결과에 따라 평가된다. 200여 년 전, 화성 신도시에서 시도되었던 계획과 구상은
비록 성공과 실패가 엇갈리지만 다양한 시도만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오산을 포
함하는 경기남부 역사의 새로운 발걸음이자 원동력이었다.
61) 당시 개설된 시전이 현재 북수동 일대에서 성행했다는 ‘八富街’로 이어져 지금도 수원의 남문[팔달문]시장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
된다.
62) 화성 성역 기간 동안 전국에서 모인 임금노동자들은 성역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눌러앉아 수원 인구 증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