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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오산의 항일투쟁
글 _ 남경식 Ⅰ 오산학연구소 상임위원
일제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
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체의 언어와 정신을 빼앗기는 노예
상태가 됨으로서,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국권을 되찾기까지 끊
임없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오산에서도 이러한 항일투쟁이
있었다. 1919년 오산장독립만세운동과 1926년 오산공립보통학
교(현 성호초등학교), 오산공립농업보습학교 맹휴사건이다.
오산장을 이용한 독립만세운동 등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규합되자 의거할
것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제의 야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만적이고 파괴적인 민족말살정책, 수탈 오산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14일 성호면 오산리에서
정책과 헌병경찰제도에 맞서 한민족은 최초 시위운동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경의 경계로 거사 되지
분연이 일어나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서 못했다. 일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결정치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
울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고 있었다.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독립만세 3월 25일과 26일 양일에는 오산리의 독립만세운동이 오산공
운동이 일어났다. 현장을 목격한 오산 립보통학교 졸업자와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
의 세교동 출신 유진홍은 감격하여 오 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산에서도 이와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 이때 일경이 총을 발사하여 3명의 총상 중경상 부상자가 발생
하게 된다. 했다. 이튿날 2건의 화재사건이 일어나 일본군과 경찰이 경계
유진홍은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에 를 강화했다.
참여하고자 상경해 있던 중이었다. 곧 이후 3월 29일 오산장날(당시 음력 2월 28일-당시는 음력으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 로 3, 8일에 오산장이 열렸다.)에 오산장 중 우시장에서 독립
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이날은 수원군 지역인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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