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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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윤(金正潤, 동탄면 신리. 태40), 태40),         로 다음날에는 권율의 세마대첩으로 유명한 곳인 독산성에서
           이교중(李敎仲, 동탄면 신리. 태40), 조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오산지역의 양산동 주민, 산성면 주
           인구(趙麟九, 동탄면 목리. 태40) 등이            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으로 파악되는데
           며 고초를 겪었다.                         일제히 불을 밝히고 만세의 함성을 소리 높여 일제에 항거한

           앞에서도 보았듯이 오산의 독립만세                 것이다.
           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천도교도들                 오산지역이 타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배경
           의 시작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오                에는 오산지역의 교육열을 들 수 있겠다. 오산은 일찍부터 학
           산장에서 좀 더 조직적으로 농민과 상               교가 설립되었는데 사립학교인 신명학교가 있었다. 일제는 이

           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산주민 모두가                학교를 폐쇄시키고,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
           적극적으로 참여한 빛나는 독립운동                 초등학교)를 개교시킨다. 학교가 타 지역보다 일찍 존재한 것
           이었다.                               은 교육열이 높았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또 다른 배경은 천도
           이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교의 교세가 있었음을 배경으로 한다. 천도교인들이 만세운동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 시위를 전파               에 많이 참여하였음은 이로 알 수 있겠다. 1905년에 경부선이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개통되면서 오산지역도 농업적인 경제침탈이 가속화되었고,
           이 오산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곧바               이러한 사안도 만세운동의 배경으로 볼 수 있겠다.


































           3·1독립항쟁의사추모비, 오산의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추모비로서 오산역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가 현재는
           오산대역 앞 아래뜰공원으로 이전되어 있음. 사진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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