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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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 67  osan culture







              랜 동지들이다. 따라서 성호면 일원에서는 오래전부터 9형제                      이처럼 많이 모일 줄은 몰랐는데 굉장
              파라고 이름이 드세었다.                                         한 인파가 몰려드니 흥분이 된 것이다.
              이들은 외로울 때 서로 돕고 기쁠 때 서로 기쁨을 나누는 혈                     이윽고 이성구 등 젊은이를 선두에 세

              맹의 동지들이다. 성호면은 경부철도의 연변이다. 수원군내                       운 시위대는 만세소리와 함께 태극기
              에서는 수원읍 다음으로 일찍 개명한 곳이다. 이들이 서울의                      를 흔들며 시내로 행진해간다. 도중에
              3·1독립거사를 듣고 평소에 지녔던 울분을 그대로 누를 수가                     장꾼들이 끼어들어 가세하니 1천명을
              없었다.                                                  넘는 큰 시위행진이 됐다. 시위 군중들

              전후 5차례에 걸쳐 비밀회합을 갖고 장날인 29일 2)에 대대적                   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주재소를 지나
              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한 그날 아침의 모임이다.                            시내를 두 번씩 누비면서 만세를 부르
              행동대장격인 이성구가 먼저 말문을 연다.                                기로 했었다.
              “안낙순 형님부터 말씀하시지요. 세마대쪽에서 인원이 얼마쯤                      그 대열이 기세도 당당하게 주재소 앞
              이리로 모이기로 했는지요. 그리고 공칠보 형님이 맡으신 부처                     에 이르자 끝내 저지되고 말았다.

              내쪽도 이야기 하시지요. 5~6백 명은 모여야 거사가 어울릴                     원래 성호면은 반농반상(半農半商)의
              듯 한데요.”                                               지역적인 특성이나 교회, 유림 등의 지
              8명이 제각기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참가할 예상인원을 체크                      반이 세지 않아 왜경들은 방심했던 곳

              하니 계획된 숫자는 훨씬 넘었다.                                    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곳에서 시위가
              “이만하면 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할 일이 더 무겁군요.                    터졌다. 더구나 이곳은 동척(東拓)에
              제가 이규선, 정규환동지와 전위대로 앞장서서 안낙순, 유진                      편승하여 일인 거류민이 많이 살고 있
              홍 형님을 선두로 모시겠습니다. 김용준, 공칠보 형님들은 나                     다.
              이가 드셨으니 중간에 서시고, 다음 두 분은 맨 뒤에서 시위                     그들은 필사적으로 시위행진을 저지

              군중을 북돋아 주시면 되겠군요.”                                    한다. 중과부적으로 함부로 총을 쏘
              아무런 이유나 이론이 없다. 이성구의 대견한 제의에 행동으                      아 댈수도 없다. 그것보다도 여기는 발
              로 옮길 차비를 한다.                                          안이나 조암, 사강 같은 오지와는 다르

              이날 상오께 우시장은 흰옷을 입은 백의군상으로 빽빽하게 찼                      다. 서울과 수원이 가깝다. 총질을 하
              다. 소시장이라야 규모가 크지는 않다. 거래두수도 매장마다                      여 살상이라도 나면 삽시간에 신문기
              50여 마리를 넘지 못한다. 그것도 하오에 들어서면 파장이 되                    자나 외국선교사들이 달려올 지척의
              고 마는 소시장이다.                                           거리이다. 총소리야 십리 안팎으로 들
              파장 무렵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인파를 바라보면서 9명의 동                      려 우선은 진압할 수 있겠지만 신문에

              지들은 목노에서 막걸리 한 사발씩을 축배삼아 들여 마신다.                      터지면 삼천리 방방곡곡에 모두 들릴



              2) 음력으로 2월 28일, 1937년을 기준으로 이전은 음력, 이후는 양력 3, 8일에 오산장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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