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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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






           분도 되나보다. 그러나 그들의 기분은 10년 동안 맺쳐온 한을                    록 현지조달을 원칙으로 하도록 압력
           풀자는 기분이었다.                                            을 가했었다. 말하자면 공짜로 생겼으
           “오늘저녁 거사는 네 갈래로 나누어 거사를 한다. 1조는 면장                    니 털도 뜯지 않고 삼키자는 뱃장이다.

           문가네 3) 집을 습격하여 그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고, 2조                    어느 날 저녁 데라우찌는 번뜩 생각
           는 왜놈 지주겸 장사꾼 이께다 등 몇 놈의 집을 박살내고, 3                    키우는 것을 얻었다.
           조는 제일먼저 행동하여 전화국을 습격하여 통신시설을 파괴                       한국 땅 안에는 수만 수천정보의 역전
           하여 서울, 수원과 연락을 차단하고, 4조는 시가지를 행진 주                    토(驛田土), 궁원전(宮院田)이 있다. 이

           재소 앞에서 시끄럽게 굴어 1·2·3조의 행동이 완수되도록 시                    것을 모조리 총독부 재산으로 수용하
           간을 얻는다.”                                              면 큰 재산이 될 것이다. 이 재산을 미
           이런 계획을 짜고 제각기 부서를 맡으니 이것이 낮에 못 이룬                     끼로 일본의 군벌·재벌들을 끌어 들
           성호면의 어마어마한 야간 독립만세시위이다.                               이면 막대한 돈이 생길 것이다. 그러
           그러면 성호면의 시위 군중들이 어쩌자고 면장을 때려잡고 주                      면 나는 굳이 본국정부에 대해 예산구

           재소, 우체국, 일인들의 집을 부수자고 겁도 없이 나섰을까?                     걸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꼽기에도
           그들에게는 그 나름대로 한이 있었다.                                  군벌에 붙은 몇 놈은 청일, 러일 전쟁
           서울 장안의 친일배나 산간오지의 농민들은 덜 겪은 한이 이                      턱에 몇 천만 원, 몇 억쯤 챙겨 2세들

           들에게는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삶과 직결되는 원한이 총독부                      이 떵떵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놈들을
           가 세워지고부터 서려왔던 것이다.                                    종용하면 기꺼이 받아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총독부는 친일배와 짝짜꿍으로 농민들의                         데라우찌는 서둘러서 한 달도 채못되
           한이 되는 온갖 착취행위를 그대로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어 토지조사령을 만들고 설치게 했다.
           1912년 총독정치가 시작된 지 2년째 되던 해이다.                         급하게 식성이 당길 때에는 손쉬운 노

           총독부는 토지조사령을 만들고 조사실시를 부랴부랴 서둘렀                        른자위부터 후비는 법이다.
           다. 한국 안에 있는 전 국토에 대하여 토지의 지번, 지목, 면                   이들이 토지조사라는 미명아래 착취
           적, 지가, 등급 등을 매긴다는 취지였다.                               의 마수를 먼저 뻗친 곳은 철도연변

           그 취지만은 그럴싸했지만 문전옥답의 수탈을 목적으로 했던                       평야지대와 서울 근교부터이다. 시골
           것이다. 당시의 총독 데라우찌는 한국을 집어삼킨 다음 막대                      오지야 서서히 뜸을 드렸다. 손을 대
           한 개발자금이 필요했다.                                         도 좋지만, 자금의 궁색을 펴자면 우
           일본의 내각은 열강과 맞서기위해 더 많은 군비 더 많은 세계                     물가의 찬물도 숭늉으로 알고 퍼마셔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니 한국에 대한 투자는 인색하여 되도                      야 했다. 수원평야의 중간지점에 있는





           3)  『오산시사. 1998, 2009』「행정편」에 의하면, 1919년 당시 성호면장은 유종열(劉鍾烈, 재임기간 1918~1920)로, 문면장은 잘못 기록(오
             기)된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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