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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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 67 osan culture
부터 정정당당히 부수고 들어가야 했는데 행동대는 자신들의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뒷
계획에 쑥스러움을 갖는다. 공론이 분분했다.
알고 보니 이날 밤 일인들은 엽총을 가지고 주재소에 긴급출 문면장은 서울에서 묵는 사흘 동안 칙
동이 된 뒤였다. 그러니 안에 있던 아녀자들은 십여 개의 유 사 대접을 받고 서명뭉치를 꾸려 29일
리창이 와장창 깨지고 돌이 날아드는 바람에 기겁을 하여 목 수원에 도착할 무렵 성호면에서 군중
욕통에 몰려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없는 싸움은 시위가 벌어졌다는 충격적이 뉴스를
비겁하다. 아녀자들에게 손찌검을 할 수는 없다. 들었다.
“면장 놈 집으로 가자! 그놈을 붙잡아서 자갈을 입에다 채우 눈앞이 캄캄했다.
자.” 3월1일 이후 주재소 왜경들과 일인들
면장집 둘레에는 이미 1백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아우성이다. 앞에서 “성호면장으로 내가 있는 한 면
우체국과 일인 집 공격조가 합세를 하고 시민들도 모였다. 민들의 3·1봉기는 꿈조차 못 꿀 일이
“문가놈 나오너라! 너는 독안에든 쥐새끼다. 썩 나와서 면민들 다.”
앞에 엎드려 사죄하라.” 그 호언장담이 물거품 마냥 지워졌으
이곳도 겁에 질렸는지 대꾸가 없다. 면장 문가는 운수 좋은 사 니 당장 일인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나이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서울의 친일 거물들은 동경 또 제가 저지른 죄과에도 와락 겁이
의 일본정부와 천황에게 사죄특사를 보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났다. 그렇지만 시리와 아리에 민감한
이번 거사가 일부 몰지각한 부정한 조선인들이 황은을 망각하 문면장이다.
고 저지른 행위이니 대죄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죄특사 “허허 참 낭패로다. 행운이 더 뻗을 줄
에게 휴대시킬 1백만 명 서명운동을 크게 벌이는 중이었다. 그 알았는데.”
러니 전국에서 일본에 붙어사는 벼슬아치와 그 비호를 받는 문면장은 서울을 떠날 때 사죄사절 파
일부 지주계급이 여기에 동조했음은 뻔한 노릇이다. 이 서명 견준비회로부터 5백 명의 서명을 받도
운동에 문면장이 안 낄 리가 없다. 서울에서 소식이 전해지자 록 종용받았다. 헌데 문면장은 한술
근질근질하던 참에 3일전에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더 떠서 1천명을 받겠다고 우겨 서명용
짝달막한 키에 시속은 다 가췄다. 지체 높은(?) 면장이니, 그 지를 한아름이나 더 얻어가지고 내려
의 몸차림은 제대로 위엄을 부렸다. 모닝코트에 금테안경, 우 왔다. 이 광경을 본 다른 곳의 면장들
똑한 예모 거기다 단장을 팔장에 드리웠다. 그러나 그의 꼴은 은 조소를 하면서도 한쪽으로 부러워
참으로 가관이다. 키가 작으니 옷자락이 땅에 찰랑거린다. 다 하기까지 했다.
리가 짧으니 총총 걸음이다. 어깨까지 차는 단장을 들었으니 경부선 열차에 오르자 그는 절로 회심
거치장스럽다. 거기다가 최근 몇 해 사이에 졸부가 되었으니 의 미소를 지었다.
얼굴엔 개기름이 주르르 흐른다. 성호면에 단한사람의 하꾸라 기회는 잡아야한다. 1천명쯤, 도장을
이 신사로 자신도 자찬을 했지만, 면민들은 그가 행차할 때면 새겨서라도 찍어다주면 된다. 아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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