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오산문화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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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
주조하는 기술은 고도의 숙련도와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석기만을 사용하던 사회
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직업의 전문화, 교역의 발달, 계층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는 혁신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와 마제석기가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청동기를 제작 사용한 시기로서,
고인돌과 같은 정형화된 무덤이 등장하고 농경을 주요 생계경제로 하면서 사회복합도가 한 층 높아진 시
대를 가리킨다. 공간적으로는 한반도 전역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랴오닝〔遼寧〕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
역, 그리고 그와 인접한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문헌의 내용과 고인돌, 석관묘,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미송리형토기, 팽이형토기, 점토대토기를 근거로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의
형성과 발전이 이루어지는 시기로서 매우 중요하다. 청동기시대의 시간적 범위는 상한 연대를 기원전 1500
년으로, 하한 연대를 기원전 300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오산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금암동 고인돌을 비롯하여, 외삼미동, 지곶동, 가장동에서 확인된 몇몇 고인돌
유적만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대규모 택지개발과 이에 수반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집터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유적이 보고되고 있는 상황이다. 발굴결과를 살펴보면 현재는 세교 신도시로 개발된 오산 내삼
미동, 궐동, 청학동, 탑동 일원은 원래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삼미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걸치는 시기의 집터 40기가 발굴된 대규모 유적이다. 규모가
가장 큰 집터는 길이가 22m에 달하며, 너비는 3.3m이다. 이 유적에서는 집터와 구덩이 등에서 토기와 곡
옥, 석기 등 유물 총 362점이 나왔다. 이 유적의 가옥 40기가 모두 같은 시기에 존재하지는 않았으며, 동
시에 존재했던 가옥의 수는 20여 동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산지역 마을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내삼미동유적은 최초의 마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보다 더 앞선 시기의 마을 유
적이 새롭게 발굴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절대연대가 측정된 14호, 17호 집터의 연대는 기원전 10~9세기
로 나왔다.
오산 금암동 고인돌유적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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