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오산문화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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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VOL. 59 osan culture
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하여는 제당의 앞부분은 경사진 지형을 예전에는 산제사에 올릴 떡시루
기억하고 있는 제보자를 만나지 보강하고 당에 오르기 쉽게 하 나 조라술 등의 음식은 당주집
못하였다. 기 위해 시멘트로 세 개의 단을 에서 준비하였다. 조라술는 누
설치하였다. 또 이 단에서 조금 룩과 엿기름을 함께 사용하는데
성황당의 산제사는 제일이 정하 떨어진 곳은 산의 바닥을 평평 산신제가 있기 전날 밤에 담가
여지지 않았다. 매년 시월 초에 하게 고르고 단단하게 골라 놓 당집의 동쪽에 묻기도 하고 당
마을회의를 통하여 길일을 택일 은 공간이 있다. 이 부분은 제사 집의 서쪽에 묻기도 하였지만,
하였다. 먼저 당의 위치와 형태 를 지낼 때 제물을 준비하는 공 주로 남쪽의 우측에 묻어두었
는 이러하다. 당의 주변은 약간 간으로 활용 된다. 다. 이는 당집이 남향이기 때문
경사가 져 있으나 비교적 완만 산제사를 주관하고 참관하는 사 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 밖에
한 편이며, 주변의 숲은 주로 여 람은 모두 세 명을 선출한다. 이 제수준비는 제관도 축관도 아
러 그루의 참나무들로 구성되어 들 셋은 모두 생기복덕을 보아 닌 마을의 일을 맡아보는 이장
있다. 당은 약 한 칸 정도의 기 가려지는데 부정이 없는 사람들 의 몫이었다. 제관과 축관은 산
와 건물이다. 이어야 한다. 산제사를 지내기 제사를 지낼 때까지 몸을 정결
위해 당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 하게 하는 것 외에 별도의 역할
서까래와 지붕은 흙과 나무로 은 바로 당주를 비롯하여 제관 이 주어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
되었으며, 벽은 시멘트로 발라 과 축관 이렇게 세 사람으로 국 이다.
져 있다. 정면에는 여닫이문이 한되었다. 나머지 주민들은 절
설치되어 있었으나 문이 썩어 대로 참관할 수 없었다고 하며 가수리의 산제사는 철저하게 유
떼어낸 상태로 개방되어 있다. 현재에도 이러한 금기는 엄격하 교식으로 거행된다. 당주와 제
제당의 정면에는 ‘誠惶堂’이라 게 지켜지고 있다. 관, 축관이 제당에 올라가 희생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제당 외부 당주, 당주부부, 당주집은 마을 으로 올리는 소의 내장 가운데
의 네 기둥에는 각각 동방지신, 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 어떤 여러 부위를 삼아서 탕으로 올
서방지신, 남방지신, 북방지신 집의 부부보다도, 그리고 그 어 리고, 나머지 소의 모든 부위를
이라고 쓴 종이를 붙였다가 떼 떤 집보다도 정결하여야 한다. 당집 내부의 좌측에 소를 옆으
어낸 흔적이 남아 있다. 제당 재 이를 위해 당주로 선출이 되면 로 눕힌 듯이 전체를 올린다. 탕
부는 정면에 시멘트로 만든 제 황토를 대문 한쪽에 놓고 물을 을 올리고 메를 올리기 위하여
단이 설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떠놓았다. 부정한 사람 들어오 사용하는 물을 모두 당우물을
제사에 필요한 각종 제기가 보 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길어다가 준비하였다.
관되어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 또한 당주부부는 당집인 성황당
낼 때는 경로당에서부터 전선을 의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당우물 소는 오산 우시장에서 구입하여
연결하여 사용하는데 필요한 것 로 가서 목욕을 하여 몸을 정갈 화성시 정남면에 있는 도살장에
들이다. 히 하였다. 서 잡아 온다. 이 때 소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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