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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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 또는 10만 년 전 경으로 보는 등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렇지만, 인접한 중국에서 100
만 년 전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그만큼 올라가는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갈을 다른 돌에 내던지거나 돌끼리 부딪쳐 깨뜨리는 식으
로 석기를 만들었다. 이른 시기의 석기 중에 대형 석기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석영이나
규암 등 석기 제작에 쓰인 원석의 한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러한
석재로도 점차 소형 석기를 잘 만들게 되었고 거친 원석에서 떼어낸 박편을 가공한 석기도 늘어
났다.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반암, 혼펠스, 규질혈암, 유문암이나 흑요석과 같은 양질의 석재를
이용해 돌날이나 슴베찌르개와 같은 특징적인 유물을 만들었으며, 구석기시대가 끝날 즈음에는
아주 작은 크기의 돌날을 그대로 쓰거나 이를 가공한 석기가 보급되었다. 즉 구석기시대 도구는
거친 재질의 암석을 원료로 한 대형 석기가 주를 이루었으나, 긴 시간이 흐르며 기술이 발달하
면서 점차 작고 정교하며 규격화되고 다양해졌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연천 전곡리유적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그 이후
남한 지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형태와 제작 기법은 원석을 몇 차례 때려 만든 것부터 정
교하게 전면을 가공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발견 당시 주먹도끼는 아프리카와 유럽
이 발전된 형태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사용하는 문화권이며, 동아시아는 찍개문화권이라는
소위 ‘모비우스의 가설’을 반박하는 증거로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의 주먹도끼는 소위 ‘전형적 아슐리안’주먹도끼와 형태적으로 다른 점이 있고 유물의 공반관계
와 연대에 있어서도 상이한 양상이다. 따라서 이의 평가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구석기시대
인류문화사 연구에서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은 생계자원으로 동물성 단백질보다는 채집활동을 통해 식물자원을 더 많이
이용했다. 초기 고인류는 동물성 단백질을 사냥으로 얻기보다는 보통 다른 짐승이 먹고 버린 사
체에 붙은 고기를 뜯어먹었을 텐데, 호모속의 등장 이후 사냥은 점차 중요해져 후기 구석기시대
유럽에서는 산양이나 순록과 같이 집단적으로 계절이동하는 동물을 집중적으로 사냥하거나 매
머드 같은 대형 포유동물을 잡아먹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생계경제와 관
련된 증거는 많지 않은데, 단양 구낭굴에서 출토된 사슴뼈는 후기 구석기시대 사냥의 증거라고
해석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이 끊임없는 이동을 필요로 했던 만큼, 당시의 주거 형태는 돌이나 나무를
이용한 임시 야영지 같은 형태이거나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했다. 대전 용호동이나 장흥 신
북유적에서는 화덕자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고학으로 본 선사시대의 오산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