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9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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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지난 100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제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암흑의 시대를 겪었다. 국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력 탄압과 6.25
한국 전쟁의 냉혹한 민족 분단의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은 다시 일어섰다. 불굴의 의지로 경제개발에 앞장서서 지구촌에 우뚝
섰다. 세계인의 축제인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와 2002 월드컵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세
계 10대 무역 강국을 이룩하였다.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민족의 웅비를 보여 주었다.
이렇듯 어려운 시기에도 오산 시민들은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내 고장 발전을 위한 인재
육성에 앞장섰다. 우리 고장 오산의 발전을 위하여 고을마다 서당과 학원을 세워 학생들을 가르
쳤다. 교육의 힘이 국가의 흥망성쇠와 국운을 좌우하는 백년지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육은 국가 발전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다. 따라서 세계 각국은 자국의 융성을 위하여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교육 투자에 관한한 우리나라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다.
선사시대에도 우리 오산의 선인들은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를 이끌었다. 오산시 외삼미동에는
별자리를 새긴 탁자식 고인돌을 남겼고 오산시 금암동에는 개석식 고인돌을 남겼다.
삼국시대에는 오산의 진산 독산에 책(柵)을 세워 말갈과 낙랑의 침략을 막았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중요한 토경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에는 조세를 운반하는 사창을 두어 조운 제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오산시 지곶동의
독산성과 화성시 정남면의 사창터는 그 흔적이다.
조선시대에 독산성은 왜군의 침략을 분쇄하는 국난극복의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효행의 모범
을 보인 정조대왕의 사적지가 되었다. 지금부터 224년 전, 성군 정조대왕은 오산시 궐동에 궐리사
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공자의 仁 사상에 바탕을 둔 효제충신의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1913년 4월 1일, 우리 고장에 근대식 교육기관인 오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이후 우리
고장 오산 교육은 줄기차게 발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였
다. 그리하여 오산공립보통학교의 개교 후 한 세기를 넘긴 2017년에는 초·중·고등학교 40개
에 약 2만 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단단한 틀을 갖추었다. 거기에 더하여 오산대학교와 한신대학
교가 국가 전문 인력 양성과 국민들의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경기도의 중심에 위치한 우리 오산은 한반도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
오산교육의 백년지대계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