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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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읍동(樓邑洞)의 지명유래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땅에도 이름이 있는데, 우리는 지명이라 한다. 이 지
명에는 그 지역의 정서와 특징을 담고 있다. 필자는 오산시의 여러 지명 중에서 특
히 누읍동의 지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누읍동의 지명유래에는 마을의 지형이 와
우형(臥牛形)이라는데서 ‘누운 소’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누운소 > 누은소 >
누음소 > 누음새 > 누읍새 > 눕새로 구전되면서 눕새골(누읍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먼저 지명의 글자 해석을 먼저 따라야 한다고
본다. 樓邑洞(누읍동)의 글자를 그대로 해석한다면 읍치가 있던 동이라는 뜻이다.
읍치는 현재의 관공서, 즉 행정치소가 있던 곳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누읍(樓邑)이 있던 곳이다.
예로부터 읍치가 되려면 보편적으로 세 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첫
째가 행정관아, 둘째가 서당 또는 서원이요, 그리고 셋째가 행궁이다. 이 세 조건은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면 누읍동이 이 세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현재 이 세 가지 중에서 눈으로 실제 볼 수 있는 곳은 서원(서당)으로 누읍동 인근
궐동의 화성궐리사이다. 정조가 칙명으로 사액하기 전에는 공서린이 세운 서원(서
당)이었다. 읍루는 누읍동의 지명에 포함되어 있으며, 즉 현재의 누읍동이며, 행궁
은 궐동의 궁(宮)터이다. 이 궁터는 예전에 궁(宮)터가 있어 붙여졌다는 설과 마을
의 생김새가 활의 모양인 궁(弓)처럼 생긴데서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는 있으나,
1899년(광무 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초평리 궁기리(宮基里)가 나
오고,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초평면의 궁대(宮垈)
등의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행궁이 있었던 마을로 본다. 누읍동은 읍
치가 있었던 곳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필자가 지명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추론한 것이다. 이 필자의 가설은 언젠가 기록물이 발견되어 확인 가능한 설이 되
리라 본다. 오산시의 법정동 22동은 비록 동으로 나뉘어 있으나, 동의 면적이 적어
인근동끼리 묶어도 한 묶음 동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작다. 누읍동 서편 뒤에
탑동이 있다. 탑동에는 지금은 없어졌다는 읍탑이 있었으며, 이 읍탑을 돌며 구복의
탑돌이 하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마을의 탑돌이를 하던 읍탑은 행정관아가 있는
읍치 중심에 설치하기에 누읍동이 읍치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더하는 증거가 된
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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